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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 May 09. 2024

죽음을 모르는 이유

죽음의 대화


죽으면 말길이 끊긴다고 말한다. 죽은 이가 산 자에게 죽음에 대해 말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 죽음은 영원한 미스터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들려오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있다. 


철학자 몽테뉴는 젊은 시절 말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는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려 보는 사람은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 몽테뉴는 고통스러웠을까? 당시 상황을 몽테뉴는 글로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말에서 떨어져 만신창이가 된 그때 몽테뉴는 부드럽게 잠드는 느낌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게 죽음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후 몽테뉴는 달콤한 잠을 자듯이 누워있었고, 이때 죽었다면 매우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몽테뉴는 죽지 않았다. 몽테뉴는 치료 약을 거부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몸은 회복되었다. 아마도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싶다. 젊은 세포는 스스로 회복하는 힘도 강했을 테니까. 

그러나 몸이 회복될수록 몽테뉴는 강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죽음에 가까웠을 때는 모든 것이 부드럽고 달콤했는데 현실로 돌아오는 회복 과정은 고통 그 자체였다. 


나는 이 비슷한 이야기를 2주 가까이 혼수상태에 있었던 친구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몽테뉴의 이야기를 읽는데 정말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죽음을 경험한 이는 만날 수 없지만 죽음 언저리를 경험한 이의 이야기는 들을 수 있었던 거다. 




나이가 들고 나니 친구를 만나면 서로의 부모님 안부를 묻는 것이 첫 번째 인사일 때가 많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부모님이 편찮으시니 말이다.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죽음에 대한 대화를 부모님과도 해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모두 그게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모두 어려워하는 이야기가 나한테만 쉬울 리 없었다. 하지만 난 어렵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 친구는 그런 이야기에 부모가 서운해한다고 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다고. 나는 아니라고 본다. 부모가 당장은 서운한 맘이 들지 모르지만 그간 자식을 보아오지 않았나, 나를 보아오지 않았나. 그렇다면 자식을 그리 나쁘게 오해만 할 리 없다. 그리고 그 기회에 서로 어떤 죽음을 준비할지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이가 싫어해도 공부를 시키고, 골고루 먹이고, 운동을 하게 하고, 예의를 가르친다. 아이는 매몰차게 시키는 부모가 서운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안다. 부모가 왜 그리했는지. 그리고 그 덕에 건강하고 바르게 자란다.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사회인이 된다. 


왜 최고 어른인 부모만 다시 아기 시늉을 해야 한다고 여기는 걸까. 그리고 왜 그걸 허용하는 걸까. 아이나 노인이나 약자인 것은 같은데 왜 우리는 노인만 그리 대하는 걸까.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누군가를 해하는 것이 아니다. 

난 내가 그리 죽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부모도 그러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개별적인 것이다. 나의 기준이 다른 이의 기준이 될 수는 절대로 없다. 그래서 더 묻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사를 전할 수 없을 때, 스스로 판단이 어려운 때 자신의 죽음을 다른 이가 결정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난 그 자리에서 이런 속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모두 다르고, 부모의 병환에 고민이 깊은 친구가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내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난 아빠가 남긴 뚜렷한 말들이 가장 위로가 되었다. 화장을 원치 않는다는 말을 그대로 따르고 나니 맘이 좋았다. 돌아가셨지만 아빠가 원하는 것을 해드렸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어떤 이는 죽음을 앞에 둔 아버지에게 '두려우세요?'하고 물었는데 그렇지 않다고 해주신 말에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미스터리한 죽음 앞에 이런 대화 하나 하나로 버텨낼 수 있고, 알 수 없는 그 일을 잘해나갈 수 있다. 그리고 말길이 끊기기 전에 죽은 이가 원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죽음은 두렵고, 슬프지만, 자연의 순리로 반드시 드러나는 일이다. 그러니 죽음 앞에 우리는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그중 하나가 죽음에 대한 대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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