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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 May 23. 2024

강박이 취향이 될 수 있게

강박아, 거기서 멈춰

나는 오랜 세월 글쓰기를 업으로 한 사람이다. 뛰어난 재능보다는 성실함으로 글을 써왔기 때문에 마감을 어긴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마음가짐 때문이었을까? 나는 누가 깨우지 않아도, 알람을 맞춰두지 않아도 새벽마다 일어나 글을 썼다. 써야 할 글이 많으면 새벽 2시에 일어났고, 그보다 덜할 땐 4시에 눈이 떠졌다.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내 몸을 조종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느새 습관이 되어 나는 잠을 잘 자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습관은 나이를 먹으며 더 단단해졌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강박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조바심이 나고,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해 답답증을 느꼈다. 하지만 느껴지는 마음대로 하다가는 나도, 주변도 불편해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 답답증이 몰려와 맘이 불편할 때면 나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내가 나를 설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제 고집만 내세우는 고집쟁이가 될 것만 같았다.


나이가 들면 많은 변화가 생기는데 그중 하나로 고집스러워지는 것을 꼽는다. 우리는 고집스런 노인을 셀 수 없이 많이 봤다. 나이 먹으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괜한 고집을 부리는 노인을 환영할 이는 없었다.  




나의 시아버지는 병원 예약이 잡히거나 병원에 다녀온 후에는 자식들에게 같은 말을 계속 물어서 힘들게 했다. 몇 월 몇 일 예약이 되어 모시고 가겠다고 해도 누가 올 거냐를 몇 번이고 확인했고, 병원에 다녀와서 드실 약이며 치료 과정에 대해 설명해 드려도 묻고 또 물었다. 원하는 만큼 설명을 다 듣고도 스스로 복용 설명서를 일일이 읽어야 하고, 그 설명서를 버리는 법이 없어서 파일첩으로 보관했다. 하지만 다시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는 없었다.


시아버지의 주변은 오래전부터 아방궁이라고 불렸다. 자신의 물건을 차곡차곡 진열해 두어서 함부로 만지지 못하게 했다. 문제는 주위 공간을 대부분 차지하고, 널려놓아서 나머지 사람들이 불편했다는 거다. 하지만 조금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그것을 늘 불만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 나는 그런 시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시아버지가 응급실에 갔을 때였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 힘든 와중에도 시아버지는 자신에게 달린 링거 줄, 산소호흡기 줄, 소변줄 등을 꼬이지 않게, 바르게 정리하고 싶어 했다. 몸을 뒤척이고, 다리 들어 올리기를 하며 줄이 모두 정리되고 나서야 안심한 듯 바르게 누웠다. 그 모습에 그간의 일들이 이해됐다. 그건 당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거다.


응급실에 있는 순간에도 줄이 꼬이지 않고, 바르게 되기를 원한다면 평소에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식들을 믿고 기다리고, 자식들 귀찮지 않게 그만 물어야지 하는 맘이 들어서기 힘들었을 거다. 드시는 약이 많아서 목이 아프도록 설명을 하고 또 하고 집을 나서도 시아버지는 다시 다른 자식에게 약 먹는 방법을 물었다. 그러니 당신 맘속의 불편함은 어떠했을까.




시아버지와 비슷한 모습은 점점 우리에게도 나타나고 있었다. 남편은 나이 들며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보는 걸 힘들어했다. 청소기를 아무리 돌려도 돌아서면 떨어지는 것이 머리칼인데 그걸 보기 힘드니, 늦은 밤에도 청소기를 손에 쥐었다. 내가 청소기를 다 돌렸다고 해도 다시 청소기를 돌리곤 했다.


머리카락에 강박을 보이는 남편을 한심하게 보는 나는 어느 순간부터 컵을 테이블 바닥에 그냥 놓지 못하고 있다. 컵과 테이블이 맞닿는 느낌이 싫었다. 딱딱한 것과 딱딱한 것이 부딪히는 느낌이 불편했다. 그래서 커피든 물이든 마시려면 항상 컵 받침이 필요했다. 세상에는 예쁜 코스터가 많은데 내가 원하는 것은 예쁘면서도 부드러운 것이다. 그래서 천으로 된 것이나 실리콘으로 된 것을 선호한다. 그래야 컵이 바닥에 거칠게 부딪히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컵받침을 늘 쓰는 나를 위해 언니가 스페인 여행을 다녀오며 예쁜 코스터를 사다 주었다. 그런데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다시 돌려줬다. 코스터는 너무 예뻤지만 나무로 만들어져 컵을 내려놓을 때 소리도 나고, 부드러운 감촉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니 쓸 수 없었다.


커피를 내리면 항상 손뜨개하여 만든 컵받침이나 카펫 모양의 컵받침을 쓴다. 그래서 식탁이며 책상에 여분의 코스터가 늘 한 장씩 놓여 있다. 카페에 가서는 휴지로 컵을 받친다. 내 것만 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아 일행의 컵에 일일이 휴지를 깔아 받쳐준다.

가끔 맘에 드는 컵받침을 내주는 카페에 가면 기분이 좋다. 그래서 그 카페를 높게 치켜세운다. 아주 맘에 드는 카페라고 말이다.   



   

강박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많은 사람이 겪고, 나이 든 사람들은 더 흔하게 겪는다. 오랜 시간 이어온 습관이 단단해져 강박이 될 수도 있고, 몸 상태나 상황이 달라지면서 어쩔 수 없는 강박이 생긴다.


나이 들어 뇌 기능이 떨어지면 해야 할 일을 잊는 일이 잦고, 자신이 한 일도 쉽게 잊어버린다. 수십 년 전 일은 기억나도, 아침에 뭐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러니 가스불을 껐는지, 현관문은 제대로 닫았는지 불안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확인하고 또 확인하기를 반복한다.


또 신체 기능이 떨어지면서 행동에 제한도 많아진다.  50대 이후 여성의 40%가 요실금을 겪는다고 하고, 남성에게는 전립선 문제가 흔하다. 그러니 외출을 할 때면 화장실에 미리 가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무슨 일을 하든 화장실 먼저 가야 하고, 화장실 가는 횟수도 늘어난다. 상황이 이러니 화장실에 대한 강박이 생기는 것이다. 노인에게는 일일이 설명할 수 없지만 자기만 아는 자기 몸 편한 상태가 따로 있다. 그래서 노인의 행동을 고집스럽게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노인의 강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약해진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자기 방어적인 선택임을 알 수 있다. 몸이 약해지고, 뇌 기능이 떨어진 노인은 생활 곳곳에서 불안감을 느낀다. 그래서 더 조심하고, 더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으려 하고, 더 확인하려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과신하고, 나이를 무기로 밀어붙이는 노인도 있지만, 그 이면에 불안감에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이 들수록 자신의 불안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노력도 필요하다.      


나는 요즘 요리할 때 타이머 기능을 이용한다. 불 끄는 걸 잊어버려서 요리를 망치는 일이 종종 생기면서 나를 믿지 않고, 타이머 기능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요리할 때 스트레스가 확 줄었다. 내내 주방에 있을 때도 냄비를 불에 올리면 타이머를 쓴다.

앞으로도 발달한 현대 문명으로 나의 불안과 강박을 조금씩 해결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더 예쁘고 희귀한 코스터를 모아보려고 한다. 나의 강박을 고유한 취미나 취향으로 만들어볼 생각이다. 바람이 있다면 강박이 나의 취향 정도에서 멈췄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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