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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 May 29. 2024

딱 한번 부모는 자식을 이긴다

38. 희박하지도 희소하지도 않은 죽음 앞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는데 딱 한번 부모는 자식을 이기는 거 같다. 떠난 부모 앞에서 자식은 지고 만다.

이기적인 부모였는데, 억압적인 부모였는데, 이해할 수 없는 부모였는데 같은 수많은 갈등 속에서 남은 것은 그리움과 미안함뿐이다. 그리고 그제야 부모의 삶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니 후회와 미안함만 남을 수밖에 없다.


아빠는 할머니 장례식에 취해 있었다. 감성적인 아빠는 그래야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을 거다. 그리고 아빠는 할머니 장례식을 마치고 큰집 오빠에게만 많은 용돈을 쥐어줬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서운했는데 돌아보니 아빠에게 당시 큰 위로가 되었던 사람은 듬직하게 자란 오빠였을 것이다. 그것이 고마워 돈을 줬을 것이다. 자신의 몫을 나눠서 해줬을 테니까. 이렇게 하나하나 돌아보면 이제야 아빠가 이해되어 원망했던 마음이 미안해진다.  


시아버지에게도 비슷한 맘이다. 내 부모는 아니지만 결혼해서 20년을 넘게 가족이란 테두리에서 함께 보낸 분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서운해하고, 불편해했지만 맛난 음식을 볼 때면 항상 시아버지 생각이 났다. 워낙 먹는 걸 좋아하고 잘 드신 분이라 이 음식을 대접하면, 가져다 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곤 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런 순간은 많이 있을 것 같다.




일 년 간격을 두고 아빠와 시아버지가 떠나고 나니, 나는 이쯤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겪은 일들은 그것 없이는 견디기 힘들었다.


'죽음은 슬픔을, 가장 고통스런 슬픔을 동반하곤 하지만 모든 사람의 끝은 죽음이다. 죽음은 희박하지도 희소하지도 않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당연한 것이며 그래서 흔하디 흔한 것이다. 죽음은 자연의 순리다. 순리를 거스르는 자연은 없다. 나는, 우리는 자연의 극히 일부분이니 순리에 따라 살고, 죽는다.


그리고 나는 너무 길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니 이건 수치로 정의하기 힘든 것이긴 한데, 아프면서, 존엄하지 않으면서, 주변에 너무 큰 폐를 끼치며 길게 살지 않기 바란다. 이런 바람으로 삶을 생각하면 떠나간 아빠도 시아버지도 안타깝기만 한 건 아니다. 그간 잘 사셨고, 그 유산으로 우리가 잘 살고 있으니 아쉬움 없이 떠나셨다고 여겨야 한다.


우리는 다짐, 결심이란 걸 하면서도 한편에 다른 맘을 가지고 있다. 그게 사람의 모습이고, 마음의 속성이다. 그러니 사람이 가지는 모든 맘을 충족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죽고 싶다가도 살고 싶고, 살고 싶다가도 죽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 그중 하나를 택해서 실행했다면 그건 성공한 것이지 실패한 것이 아니다.  

    

죽음은 모든 것이 끝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식의 끝은 사는 내내 이어진다. 나는 다시는 다섯 살이 될 수 없고, 다시는 어제를 살 수 없다. 그러니 죽어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도 아주 다른 일은 아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현재를 살뿐 되돌아가는 법은 없다. 죽음도 그 현재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뭐든 좋을 대로, 편할 대로 여기고 생각하며 살려고 한다. 그렇게 사는 게 맞는 거 같다. 그래야 살 수 있는 거 같다. 후회가 지긋지긋하게 싫다면 유하게 살면 된다. 유한 것에는 걸림돌이 없으니 후회라는 감정에 걸릴 것도 없다. 난 이렇게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하루를 살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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