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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 May 22. 2024

울지 말고 일상을 살아

36. 그래야 끝까지 함께 살 수 있다

오후 늦게 시아버지의 다리 수술이 끝났다. 복숭아뼈 조금 위쪽까지 수술을 했다고 한다. 아침부터 수술을 하네마네 하더니 오후가 되어서야 하게 되었다. 남편은 예상보다 조금 절제해서 다행이라고 하다가 그렇지 않은 거 같다고 말하기를 반복하더니, 뭐든 별 다를 게 없는 거 같다고 했다. 그간 겪은 수많은 일들이 발 절단이라는 극단적인 상황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연습이 되었던 거 같다.


다리 수술을 마친 시아버지는 종합병원을 퇴원하여 요양병원으로 입원하셨다. 다리가 아물고 몸이 회복될 때까지 그곳에서 지낼 예정이다. 주말을 맞아 우리 부부는 시아버지 면회를 갔다. 시아버지 면회는 3시 30분에 시작하여 20분 정도만 할 수 있었다.


코로나 진단키트하고 면회하는 장소에 이르자 이미 시어버지가 나와 있었다. 하지만 멀리서도 그 모습은 낯설었다. 휠체어에 앉아 잠이 든 듯 꼼짝도 하지 않고, 몸은 경직되어 있었다. 우리가 다가가 인사말을 건네도 겨우 눈을 떴다가 다시 감고는 했다. 말이라고는 겨우 대답을 하는 것이 다였다. 어떤 대화도 원활하지 않았다. 메모광이던 시아버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나는 간호사실에 전화를 해서 지금 상황을 물었다. 간호사는 시아버지가 새벽까지 주무시지 않고, 공격적인 행동을 보여서 수면제를 늘렸다 했다. 섬망 증세도 있어서 관련 약을 드렸는데 그것도 잠을 부른다고.


금요일에 시어머니 면회를 갔을 때, 의사는 도통 밤에 잠을 못 자는 시어머니에게 수면제를 줄 수 없다고 했다. 온 정신으로 그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얼마나 힘들까 싶어 요구했지만 인공호흡기를 목관으로 한 시어머니는 잠이 들면 호흡이 안돼서 수면제 처방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분은 약이 지나치고, 한분은 약을 원해도 받을 수 없었다. 두 분을 보는 우리 맘은 착잡하고, 착잡했다.



         

다리 수술을 마쳤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시아버지는 비뇨기과 진료로 방광암일 거라는 소견이 있었다. 다리 수술로 이동이 힘든 시아버지를 대신하여 우리 부부가 병원 진료를 받았다. 그간 병원 기록과 검사 결과 등을 두고 상담을 받았는데, 시아버지의 몸은 어디 하나 멀쩡한 데가 없었다.

사실 수년 전에도 시아버지는 죽을 고비를 넘긴 분이었다. 혈관이 좁아지고, 막혀서 기본 시술은 물론이고, 대퇴부의 혈관을 심장과 연결하는 대수술을 한 적이 있다. 노화는 어느 한 부분만 오는 것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런 치료를 통해 생명을 이어오는 것이고, 다시 그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수술을 준비하는 거였다.


의사는 암이 공격적이지는 않지만 수술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고령이라 수술하는 것이 부담되지만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다. 몰랐다면 모를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수술을 하더라도 지금 하고 있는 소변줄을 뺄 수는 없다고 했다. 당뇨로 인해 그쪽 신경이 망가져서 지금도 소변을 제대로 보는 상태는 아니고, 그저 소변이 차서 밀려 나온 거라고 설명해 줬다. 끝나지 않을 힘든 상황이 다시 끔찍했다.




날이 춥다고 난리인데 해는 좋았다. 우리는 집으로 가지 않고, 집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서는 숨이 쉬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강이 흐르는 카페에서 검고 쓴 커피와 하얗고 고소한 감자 수프를 시켰다. 입이, 목이, 뱃속이 따뜻해지니 맘도 그 언저리에 있는 듯 말랑해졌다.

창가에 앉아 줄지어 나르는 새을 보고, 강에 둥둥 떠 있는 흰 오리도 보고, 바람에 몸을 맡겨 흔들리는 나무도 보았다. 그리고 강 건너에 묵묵히 서 있는 산도 보았다. 모두 원래 그 자리에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당분간 우리는 이렇게 풍광 좋은 카페를 찾아다니며 우리를 살게 할 거 같다. 그렇게 이 시기를 살아낼 거 같다. 힘들게 처박혀 있다가 훌쩍 어떤 곳을 찾아가 위로를 받을 거 같다. 그거면 우리의 삶에 충분하고도 남는 축복이라 여길 것 같다.


떠난 아빠와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누워 있는 시어머니,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시아버지를 둔 우리에게 따뜻한 커피는 과분한 위로였다. 우리가 찾아가는 카페는 우리의 피난처인지도 몰랐다. 이게 산 사람은 산다는 삶의 방식인지도 말이다.




아빠가 떠나시기 전, 아빠 면회를 마치고 나온 병원 앞에서 언니는 일상을 살라고 나와 동생을 다독였다. 엄마와 아빠 가까이에서 수시로 돌보고 있는 자신이 가장 힘들고, 일상을 살기 힘들었을 텐데 우리에게 그리 말해서 돌려보냈다. 그렇게 말해도 일상을 살기 힘들 거 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도 언니의 그 말을 떠올리며 다시 힘을 내서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야 하면 만났다.


부모님이 아프다고 일상을 포기해선 안 된다.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언제 돌아가시나 그 시간만 기다리는 꼴이 된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고 부모님을 걱정하고 돌보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러니 부모님이 아플수록 일상을 살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해야 한다. 그래야 끝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있다. 끝까지 함께 사는 게 된다.


난 늦은 밤이나 새벽이면 아빠 생각을 많이 한다. 아빠를 위한 나의 기도는 늘 새벽이었다. 일상을 살고, 혼자 남은 시간, 아빠를 기리고 기억했다. 지금도 무척이나 그립고, 미안하다. 하지만 이 감정이 너무 깊게 들어오면 체머리를 흔든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언제, 어디서든, 끝까지,  약해진 내 부모와 함께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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