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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 May 27. 2024

그 겨울, 5일 동안

37. 우리는 어떤 선을 넘었다

D-2, 이틀 전

아빠 제사를 지내고 10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이 회사에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제사상을 준비했다. 제사상 한쪽에 아빠의 사진이 놓였다. 아빠가 늘 그랬듯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사상 앞에 서니 눈물이 났다. 아빠의 제사상을 보다니, 거기에 내가 절을 하다니 다시 기가 막혔다. 꼬박 일 년이 지났는데 다시 슬픔이 차오르는 듯, 눈물이 차고 닦기를 반복했다. 제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데, 일 년 전 장례를 치른 것처럼 큰일을 치르고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D-1, 하루 전

7시 조금 넘어서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이 놀라서 전화를 받았다. 아산병원 어쩌고 하는 소리가 전화 저편에서 들렸다. 시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았다. 시누이의 전화였다. 시아버지 계신 요양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급하게 아산병원 응급실로 갈 거라고 한다. 요양병원에서는 폐렴인 거 같다고.


노인들이 앓는 병은 다양하지만 결국에는 폐렴으로 돌아가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누이는 남편에게 회사에 가야 하냐고 묻고, 남편은 우선은 회사에 가봐야 할 상황이라고 답한다. 하는 수 없이 시누이가 병원으로 가보겠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은 회사에 들러 병원에 가려는 듯 미리 준비를 해서 나갔다.


오전이 지나지 않아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시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산소 포화도가 떨어져 응급실로 갔던 어머니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번에도 우선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삽관이라고 했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우리는 다시 긴박한 상황에 놓였다. 의사는 삽관은 아무 의미가 없고, 한번 삽관을 하게 되면 뺄 수 없다고 한다. 시누이는 어머니때와 달리 기도 삽관을 하지 말자고 했다. 어머니를 경험하고 보니, 그건 해서는 안될 일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남편은 어영부영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시동생은 달랐다. 기도삽관을 하지 않으면 돌아가실 것이 뻔했기 때문에 하자고 하는 거 같았다. 시누이는 자신이 동생을 설득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자고 있던 아들을 깨우고 언제든 병원에 달려갈 준비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응급실에서 임종 면회를 해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병원 로비에 우리 가족이 도착하고, 이어서 시동생과 시누이 남편과 딸이 왔다. 병원에서는 최대 두 명씩 면회를 하라고 했다. 먼저 남편과 아들이 시아버지를 뵈러 들어가고, 시누이네 가족에 이어 나랑 시동생이 짝을 이뤄 시아버지 면회를 했다.


임종 면회라고 했지만 응급실에서 만난 시아버지는 숨이 가쁘다는 것만 빼면 의식이 또렷하고 말씀도 잘하셨다. 자식들이 모두 찾아오니 안심한 듯 편해 보였다. 의사는 오늘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했지만 시아버지의 편안한 모습에 괜한 안심이 되었다. 나는 의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고, 시아버지가 그렇게 금방 돌아가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족의 임종 면회가 모두 끝나고, 응급실에는 시동생이 남기로 했다. 시동생은 그동안 바빠서 시부모님 돌보는 일에 빠져있었다. 시누이와 우리 부부가 모든 일을 해결하고, 가끔 그 일이 너무 많을 때만 시누이의 부탁으로 시동생이 나섰다. 그러니 시동생은 이번만은 자신이 시아버지 옆을 지키고 싶어 했다. 응급실에서 밤을 지새울 시동생에게 밥을 먹이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응급실에 계시던 시아버지는 다행히 빈 병실이 나와서 새벽에 입원실로 옮겼다. 아침 일찍 남편과 나는 다시 시아버지를 뵈러 병원으로 갔다. 차창 밖으로 눈발이 날렸다.

코로나 이후 병원 면회는 쉽지 않았다. 일인실이라고 해도 친자식들만으로도 면회 허용 인원은 꽉 찼다. 나는 잠깐 들어가 시아버지 손을 잡고 기도만 하고 나오겠다고 했다. 그건 내가 시아버지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일이었다. 남편과 교대하는 형식으로 내가 먼저 들어가서 시아버지를 뵙고 나왔다.   

   

낮에는 아들을 데리고 다시 시아버지를 뵈러 갔다. 오후가 되니 상태는 더 나빠져 있었다. 시아버지의 손을 잡아주고, 시원하라고 머리를 짚어주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그것뿐이었다.

하나님께 고통이 덜하게 품어달라고 기도했다. 하늘나라 가셔서는 잃었던 다리도 꼭 찾으시라고 당부했다. 떠나는 이를 두고 남은 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살지 못해 떠나는 이에게도 부탁을 할 뿐이었다. 잘 떠나시라는 부탁, 그곳에서는 행복하시라는 부탁, 뭐 그런 부탁이었다. 그래서 아빠를 떠올리면 늘 ‘부디’라는 말만 되뇌었던 거 같다.


병원 로비에서 시누이는 오래전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했다. 시댁 대문 앞 감나무 아래 흰눈이 쌓이고, 그 사이에 하얀 꽃 두 송이가 피었단다. 꿈을 잘 꾸지 않는 시누이는 부모님 두 분이 눈이 올 때 돌아가시려나 했단다. 며칠 전 눈이 왔고, 그날도 눈발이 오랫동안 날렸다. 시아버지는 눈이 오던 그날, 시누이의 꿈 이야기처럼 돌아가셨다.      




그날 이후, 이틀

장례식을 모두 마쳤다. 양평 추모공원에 시아버지의 유골함을 모시고 다시 아산병원으로 왔다. 병원은 며칠 전 모습 그대로 환자와 보호자로 북적였다. 병원에 세워 두었던 차를  가지러 병원 로비를 지나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아픈 사람들, 아픈 사람을 데리고 온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바로 며칠 전, 나는 그곳에 선 사람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번호표를 뽑아 내 순서를 기다리고, 안내에 따라 진료실을 찾아다니기를 반복했었다. 병원에 오면 하루의 절반을 쓰고 지친 채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일은 다 끝난 일이 되어 있었다.

내게 다 끝난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그 사람들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과 홀가분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리고 (시아버지에 한해서) 모두 끝난 그 일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았다.  장례식 중에도 바로 옆 건물에 있던 응급실 앞을 지나며 환자와 보호자들을 마주치곤 했다. 그들은 며칠 전 시아버지 이거나 남편이거나 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제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다니, 이상했다.


이렇게 선하나 넘어서면 우리는 아주 다른 상황 앞에 서게 되는 거였다. 그리고 다시는 되돌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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