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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 Sep 06. 2022

(10화)옥수수를 받고 나는 채무자가 되었다.

복리 같은 위로

#꽉 찬 옷장 VS 속 빈 텅장

    

옷장을 열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떴다. 이 가방들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 예빈 엄마가 약속한 날짜에 돈을 갚지 않는 바람에 급전이 필요하다. 내 평생 이자가 20%, 30% 하는 대출은 받아 본 적도 없다. 그렇지만 게스트룸과 커뮤니티센터까지 잘 되어있는 대단지 아파트 고층에 살면서 수입차를 타고 다니지만 현금이 없다. 남편이 주는 생활비로 한 달 빠듯하게 생활한다. 남편도 아파트 대출금과 이자를 내고 차량 유지비며 각종 보험료를 내고 나면 본인 용돈도 빠듯한 것 같다.   

  

‘당장 200만 원도 없는 통장이라니...’     


뭐하며 살았나 생각이 든다.     

 

‘다들 고만고만 그렇게 사는 거겠지? 요즘 현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해결은 되지 않는다. 지금 당장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이 옷장 안에 있는 가방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샤테크 없이 사연만 많은 가방들     


가방 하나하나 이야기가 없는 게 없다. 난생처음 신랑이 명품이라고 큰맘 먹고 사준 토리버* 검은색 크로스백. 이건 팔아봐야 하루 외식값도 힘들겠다. 남편의 크나큰 마음을 파는 것 같아서 잘 들고 다니지 않지만 간직하고 있는 가방이다. 한 달 생활비에서 조금씩 아껴둔 돈으로 20% 세일가에 일 년 동안 육아로 고생한 나에게 주는 선물로 산 손바닥만 한 *찌 클러치. 이건 지금도 간단히 들고 다니면 유행도 안 타고 좋다. 산 가격에 비해 중고값은 얼마 되지도 않아 팔아봐야 손해다.


샤*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산 가격보다 더 많이는 아니더라도 산 가격 정도는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샤테크도 못했구나. 중고로 내놓을 가방을 고르다가 다음번엔 기필코 샤*을 사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해본다.



프라*가 눈에 띈다. 가장 최근에 사서 아마도 팔면 제값 받기는 이 가방만 한 게 없겠다. 내가 엄마들과 브런치도 먹다 말고 달려와서 겨우 두 명 미술수업해주고 번 돈으로 넉 달 동안 모아 산 가방인데... 그리고 지금도 들고나가면 다들 눈길 한 번씩 주는 신상 가방인데...  

    

#사람에게 받은 상처 치유법     


전화가 울린다. 미주 엄마다. 받을 기분이 아니다. 아마 내 목소리만 들어도 지금 내 상황을 CCTV로 지켜보듯 전화기 너머로 느껴질게 뻔하다. <부재중 전화 1>

전화를 안 받으면 보통 톡으로 남길 텐데 미주 엄마에게 다시 전화가 온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두 번씩 오는 전화를 외면하기 힘들어 전화를 받았다.

    

"미주 엄마~ 전화받으려는데 끊어져서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고 하던 참인데..."    

 

"아 그러셨어요? 도서관 가는 김에 하은이네 집 앞을 지나게 돼서 옥수수 좀 주고 가려고 전화했어요. 친한 동생이 옥수수를 많이 보내줘서 하은 엄마 생각나서 나눠 먹으려고요. 안 받으시면 문 앞에 걸어두고 가려고 했는데 계셨네요?"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게 안 좋다. 안 내려갈 수도 없고 옥수수만 받고 보내기도 미안하다.  

    

"집이 정리가 안 되긴 했는데 올라오셔서 커피 한 잔 하고 가실래요? 저는 뭐 드릴 게 없어서 맛있는 커피라도 대접할게요. 하하하"     


"아이 아니에요. 지나는 길에 드리고 가려던 참이었는데... 부담드리려고 한 게 아닌데 괜히 죄송스럽네요."     

이 사람 말도 참 예쁘게 한다. 누구한테 뭘 주는데도 생색이란 게 없다. 항상 받는 사람을 배려해서 부담스럽지 않게 신경 쓴다. 그냥 보낼 수가 없다.   

  

#옥수수알처럼 콕콕 박힌 상처    

 

스타벅스 원두로 갓 내린 커피를 예쁜 코르크 컵받침 위에 내려놓았다. 한참을 옥수수 얘기를 하며 들고 온 옥수수를 바라보았다. 옥수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유기농으로 키웠느니, 올해 풍작이니 하는 소리도 귀에 안 들어왔다. 한 귀로 들어왔다가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나는 지금 해결 못한 돈문제가 있다.


    


"하은 엄마 오늘 좀 피곤하신가 보다. 괜히 제가 들러서 쉬는 걸 방해했나 봐요."    

 

"아. 아니에요. 옥수수를 받아서가 아니라 제 생각이 났다는 게 너무 감사해서 제가 감상에 빠졌었나 봐요. 호호호"     


미주 엄마한테라도 털어놓을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다. 누구 하나라도 내 마음을 알아줘야 속이 시원할 듯하다. 자존심 따위는 이미 잔고 없는 통장과 중고로 내놓을 가방을 보면서 다 버려졌다.


망설이다 커피를 마시며 속사정을 얘기했다. 나이 마흔 넘어 믿었던 사람에게 돈을 뜯긴, 통장에 백만 원도 없는 어리석은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미주 엄마가 위로를 한다. 지금 이 일이 제일 큰일 같지만 사실 돌이켜보면 그보다 더한 일도 잘 넘기고 살아온 우리들이라고. 살면서 이런 일쯤 수십 번은 더 겪을 테고, 아마도 우리는 이미 겪고도 잊고 살고 있는 거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만큼 잘 해결하고 넘길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은 사람한테 상처를 받지만 또 사람에게 위로를 받기에 돈보다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며 나를 위로했다. 대신 이번의 경험이 단순한 경험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확실한 공부가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미주 엄마에게 얘기하길 잘했다. 다른 엄마들에게 얘기하면 걱정스레 말은 하면서도 자기는 안 당해서 다행이라는 속마음이 눈빛으로 느껴졌었다. 그러곤 내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며 서로들 조심하자고 의기투합하는듯했다.


미주 엄마 얘기를 듣다 보니 많은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여기까지 온 내가 대견했다. 고비마다 세상 끝인 것 같았고 매번 해결 못할 것 같았던 순간들을 잘 견디고 이겨냈다.

     

옛 생각을 하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나를 보며 미주 엄마가 통장번호를 부르라고 한다. 내 귀를 의심했다. 사람 좋게 보이지만 돈거래 같은 건 애당초 하지 않는 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미주 엄마가 통장번호를 부르라니.     


#커피 한잔에 채무자가 되다.    

 

"하은 엄마가 너무 큰 상처를 받은 게 느껴져요. 물론 저는 하은 엄마를 믿지만 제가 지금 돈을 드리는 건 꼭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빌려드리는 건 아니에요. 그럼 나중에 저도 사람에게 상처받을 수 있으니까요. 하은 엄마에게 드려도 좋을 만큼의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에요. 물론 마음은 더 크지만요. 그러니 불러보세요."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아 창피해서 빈 커피잔을 들고 싱크대로 가서 일부러 물을 틀었다. 같은 아파트에 친하다고 하는 아줌마들도 같이 브런치 먹을 때나 다 해줄 것처럼 굴지 애들 픽업처럼 사소한 부탁 하나도 다들 핑계대기 바쁘던데.     

 

"아니~ 그럼 제가 너무 죄송하잖아요. 옥수수 주러 왔다가 저한테 돈 뜯기고 가시는 것 같아서..."   

  

나름 분위기를 무겁지 않게 바꿔보려고 유머를 섞어가며 말해 본다. 미주 엄마는 우리 사이에 돈 좀 뜯겨도 괜찮다며 웃으며 맞받아줬다. 부끄럽지만 계좌를 불러주고 그렇게 미주 엄마는 나의 채권자가 되었다. 그리고는 전업주부가 많지는 않지만 통장에 돈을 갖고 있게 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바빌론의 부자들 이야기라니. 이 엄마 책만 읽는 줄 알았는데 재테크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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