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또 알람을 끄고 잠이 들어버렸다. 다행히 마지막 알람에는 눈을 떠서 부랴부랴 하은이를 깨웠다. 알겠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일어나질 않는다. 일단 간단히 계란 프라이를 했다. 계란 프라이에는 꽃소금보다 맛소금을 뿌려야 감칠맛이 좋다.
하은이가 할머니의 미역국을 너무 좋아해서 한 번은 미역국 끓일 때 엄마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그런데 소고기를 몇 시간 씩 푹 끓여놓고도 거기에 ‘고향의 맛 다시다’를 한 스푼 넣으시는 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마는 다시다를 넣지 않으면 절대로 맛이 안 난다고 한다. 차마 하은이에게 할머니 미역국 맛의 비밀이 ‘다시다’라고 말을 해줄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비밀이다.
‘결국 나도 엄마를 닮았나?’
하은이가 두 개씩 먹는 엄마표 계란 프라이의 비밀은 ‘맛소금’이다.
#대출도서 연체 위기
하은이를 다시 일으켜 욕실로 넣어 놓고 식탁 위에 계란 프라이와 방울토마토를 몇 방울 올려놓았다.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옷을 대충 한편으로 치우고 있는데 핸드폰 카톡으로 도서관 알림 창이 뜬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빌린 하은이 책이 내일 반납일이란다. 반쯤 눈을 감은채 욕실에서 나오는 하은이에게 책을 다 읽었는지 물었더니 두장 읽었단다. 아침이라 큰소리는 못 치고 입술을 꽉 물고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도대체 왜 왜 왜 책을 안 읽냐고. 없는 권장도서 찾아가며 겨우 몇 권 빌렸더니. 휴.’
지도 눈치가 있는지 조용히 반숙 계란 노른자를 터뜨려 후루룩 먹고 토마토 몇 알을 손으로 집더니 가방을 멘다.
‘일단 학교를 보내고 생각하자.’
가는 길에 벌써 미주를 등교시키고 오는 미주 엄마를 만났다. 미주 엄마에게 어제 있었던 핸드폰 이야기를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 커피 한잔 하자고 말해두고 서둘러 교문으로 향했다.
#숨이 차도록 빠른 걸음으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니 2인용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는 미주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몇 번 만나니 이제 편안한 기분이다. 미주 엄마는 ‘뜨아’를 나는 ‘아아’를 시키고 앉아 ‘뜨아’를 주문한 미주 엄마에게 덥지 않냐고 말해본다. 요즘 ‘얼. 죽. 아.’ 라던데. 한겨울에는 못 마셔도 이런 날이라도 ‘아아’를 마셔줘야 좀 젊은 기분이라도 든다.
“미주 아직도 수신자 부담 전화 사용하죠?”
“네 그럼요. 왜요? 하은이 핸드폰 사달래요?”
“아뇨. 몇 번 그러다가 요즘은 시들해졌는데 제가 사줘버릴까 생각이 드네요. 휴.”
미주 엄마는 그렇게 감정적으로 아이와 관계가 힘들 때 물건을 사주거나 해서는 안된다고 조금 더 고민해 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남의 말을 옮기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지만 핸드폰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어제 은진이 엄마와 통화 한 얘기를 했다.
“아니 하은이가 은진이 핸드폰을 몇 번 빌렸는데 그게 싫으면 은진이한테 절대 빌려주지 말라고 하지. 저한테까지 전화해서 아이 교육 잘 시키라는 거예요? 뭐예요? 제가 죄송하다고 하은이한테 잘 얘기한다고 했더니 글쎄, 정색하면서 그런 건 아니라고 하은이는 괜찮다는 거예요. 아니, 미주 엄마 같으면 괜찮은데 전화할 것 같아요? 당연히 안 괜찮은 거죠.”
어제 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흥분하며 열변을 토했다. 얼음이 녹아가는 ‘아아’를 ‘쭉’하고 깊이 두 번 빨았더니 좀 진정이 되는 것 같다.
‘내가 조금 남의 흉이나 보는 아줌마로 보이려나? 괜히 했나? 근데 같은 반 엄마 중에 미주 엄마한테나 말하지 누구한테 해?’
미주 엄마는 조용히 내 말을 듣더니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눈꼬리를 내리고 말을 꺼냈다.
“하은이 엄마가 많이 당황하셨겠네요. 하은이 인사성도 바르고 친구들한테도 잘하는 친군데...”
어쩜 미주 엄마는 사람이 한마디를 해도 기분 좋게 말을 한다. 그렇다고 절대 은진이 엄마 흉을 보거나 하진 않는데 나와 하은이 칭찬만 계속하니 그냥 내 편이구나 싶다. 어느새 내 기분도 시원한 ‘아아’처럼 속이 뻥 뚫렸다. 일일이 대응해서 일을 크게 만들지 말고 그냥 흘려 넘기고 그런 일로 하은이한테 화내거나 친구 얘기를 하지 말라고 위로해 줬다. 나도 공감이 갔다.
#커피 한 잔으로 빚진 독서교육
“참. 하은이가 그때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한 권도 안 읽은 거예요. 휴. 고스란히 책꽂이에 꽂혀있는데 내일 반납하래요. 권장도서 어렵게 빌린 건데...”
느닷없이 하소연을 늘어놨다. 미주 엄마가 처음에 독서습관이 잡히기 전에는 책을 책꽂이에 꽂아둬서는 절대 읽을 수 없다고 한다. 식탁 위에 한 권, 화장실에 한 권, 거실 지나가는데 한 권씩 눈에 띄는 곳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간식 먹다가, 화장실 볼일 보다가, 바닥에 뒹굴거리다가라도 눈에 띄고 손에 집히면 일단 구경이란 걸 한다며. 읽으라는 잔소리 대신 자주 책을 바꿔서 여기저기 흩어 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권장도서를 무작정 빌리지 말고 하은이가 관심 있고 좋아하는 분야로 그림이 있고 얇은 책으로 시작하라고 했다. 그게 7살 수준의 책이라도 일단 하은이가 만만하게 볼 책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게다가 처음엔 엄마가 몇 장 읽어주고 시작해야 한다.
은진이 엄마 때문에 속상했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독서습관 잡는 교육을 듣다가 당장 집으로 달려가 책을 흩뿌려 놓을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시원하게 커피를 빨아 넘기고 기분 좋게 일어났다. 왠지 미주 엄마한테 돈을 빌리지도 않았는데 계속 빚지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