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쓰기에 목숨을 걸어야 하나
초등학교 급식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다 함께 먹는 식단이라 매운 음식도 한두 가지씩 나온다. 게다가 유치원과 달리 식판을 들고 배식을 받는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밥은 많이 먹었는지 배식은 잘 받았는지 꼬치꼬치 취조하게 된다.
결국, 대답은 매운 거 빼고 김치 빼고 밥에 반찬 몇 번 집어 먹은 게 다인 거다. 1학년이 되니 집에도 일찍 와 점심도 부실하게 먹어 받아쓰기도 신경 써야 하고 알림장 써 온 걸 보며 준비물도 챙겨야 한다. 유치원 때처럼 하루하루 선생님 피드백도 없다. 친구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교실에서 친구와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논 건 아닌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집에 오는 아이의 얼굴이 조금만 어두워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하은이 표정이 안 좋다. 눈치를 보며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도 입이 오리입처럼 튀어나와 고개만 저을 뿐 말이 없다. 집 앞 아이스크림 할인 가게에서 아이스크림 사 먹을까 물어도 도리도리다. 마음 같아선 소리라도 '꽥' 지르며 '말을 해야 알 거 아냐.'라고 다그치고 싶지만 오은영 선생님의 말씀을 받들어 아이가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한다.
집에 돌아와 가방에서 알림장과 받아쓰기 공책을 펼쳐본다. 요즘은 받아쓰기를 급수별로 정리해 나눠주고 미리 연습해 가면 된다. 라떼는 선생님이 창밖을 바라보며 한 줄 불러주는 문장을 받아썼던 것 같은데…. 그래서 국어책 어느 부분을 불러줄지 알 수 없어 20점 받아오는 친구도 꽤 있었다. 어제 분명 연습해 갔는데…. 띄어쓰기나 문장부호까지 잘 맞춰 써야 해서 100점 맞기는 힘드네.
"받아쓰기 두 개 틀렸어. 띄어쓰기랑 따옴표 깜빡해서 선생님이 틀렸대."
입이 이래서 튀어나왔구먼. 공책을 보면서 '띄어쓰기랑 따옴표 엄마가 신경 쓰라고 했잖아.'라는 소리가 막 튀어나오려던 참이었다.
"그러게~ 아깝다. 할 수 없지 뭐."
100점 맞은 친구가 누구인지 묻고 싶지만, 알면 자존심 상하고 얼굴도 모르는 아이를 내가 질투할 것 같아 관둔다. 나도 받아쓰기 따위에 연연해하고 싶지 않다. 근데 점수를 막상 받아들면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에서 '기왕 하는 거 잘 좀 하지.' 소리가 나온다.
"미주는 100점 받았는데. 아앙~ 나는 두 개나 틀리고~"
질투의 대상이 미주라. 안 그래도 미주 엄마한테 내 교육의 무지함을 들킨 게 엊그제인데 이깟 받아쓰기에서 또 밀리다니 속이 상한다. 미주 엄마는 지금쯤 동그라미 가득한 100점짜리 받아쓰기를 보며 웃고 있겠지.
미주 엄마는 미주가 들고 온 빨간 동그라미로 가득 찬 받아쓰기 공책을 보며 흐뭇하게 웃는다.
"엄마 이번에도 나 100점이야. 잘했지."
"응. 그런데 미주야 꼭 100점 아니어도 괜찮아. 받아쓰기하는 건 미주가 모르는 게 어떤 것인지 알고자 하는 거니까. 틀린 건 다시 연습하면 돼. 미주가 책을 많이 읽어서 받아쓰기에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네."
미주는 알림장을 보며 책가방에 책과 준비물을 챙겨 넣었다. 엄마에게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며 논다.
간식을 챙기러 냉장고 문을 여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하은 엄마? 네~ 하은이도 집에 왔겠네요? 아~ 미주요? 지금 그림 그리며 놀고 있어요. 간식이나 챙겨주고 같이 도서관에 책 반납하러 가려고요. 받아쓰기요? 하하하. 뭐 그런 날도 있죠. 지금 100점이 인생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거 살아 본 우리가 알잖아요. 엄마들 마음만 휘저어 놓는 점수일 뿐이죠."
하은 엄마는 받아쓰기 점수가 영 신경이 쓰였나 보다. 미주 엄마는 받아쓰기 점수에는 관심이 없지만, 충분히 필요한 공부라고 생각한다, 미주는 따로 받아쓰기를 연습하진 않지만, 띄어쓰기를 중점으로 확인한다. 책을 읽으면서 익힌 단어들이라 대부분 모르는 단어는 없다. 고학년이 되면 아니 3학년만 되어도 단어를 틀리게 쓰는 걸 고쳐 쓸 기회들이 없다. 다들 수학이나 영어에 신경을 쓰게 되니 단어나 띄어쓰기 정도 틀리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4학년이나 되어서도 아이들이 어휘력이 부족하고 단어를 잘 못 쓰는 경우가 많다는 걸 미주 엄마는 알고 있다. 그래서 1학년 때 꼼꼼하게 띄어쓰기나 단어를 바르게 익혔는지 신경 쓰는 편이다.
학기 초에 나눠준 1학년 권장도서 목록 프린트물을 손에 쥐고 영혼 없이 따라오는 하은이를 재촉한다. 낯선 엄마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한 모양이다.
미주 엄마가 도서관에 간다고 했으니 우연히 마주친 듯 인사하고 미주 읽는 책이라도 보고 하은이도 책을 좀 읽혀야겠다. 낯선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빌려야 할지 모르니 일단 권장도서를 빌려야겠다. 이것만 다 읽으면 바람직한 1학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있으니 민주와 민주 엄마가 들어섰다. 도서관 안이라 눈인사만 하고 서로 책을 고르며 책장을 오갔다. 미주는 익숙하게 책장 한편에서 눈으로 '쓱' 한번 훑어보더니 책을 꺼내 '휘리릭' 대충 들춰보더니 다시 집어넣기도 하고 옆구리에 챙기기도 한다. 열 권 정도를 고르더니 자리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미주 엄마는 미주가 책을 고르는데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서 본인 책만 읽고 있다.
'미주는 권장도서 목록도 안 보고 무슨 책을 읽는 거지? 에휴. 도서관에 권장도서가 없는 게 많네. 1학년 엄마들이 다들 빌려 갔나 보네. 미주도 책이 없으니까 다른 책을 빌린 거겠지?'
겨우겨우 권장도서 두세 권을 빌리고 지나가며 미주가 쌓아놓은 책을 슬쩍 보았다. 두께가 만만치 않다. 하은이가 빌린 얇다구리 빳빳한 표지의 동화책이 초라해 보인다.
내 어깨도 함께 초라하게 내려간다.
'무슨책을 어떻게 골라서 읽혀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