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등굣길에 학교 앞 건널목에서 민주와 미주 엄마가 서 있었다. 등을 톡톡 치며 아는 척을 하려다 너무 가까운 사이인 척하는 것 같아 관뒀다. 대신 살며시 옆으로 가서 미주에게 먼저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미주 일찍 학교 왔네?"
"어머 하은 엄마. 저희도 방금 도착했어요. 하은이 안녕."
"안녕하세요. 안녕 미주야~"
아이들이 서로 인사하며 건널목을 건너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미주 엄마에게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게 많아 언제 만나면 얘기를 좀 해야지 했는데 마침 만나서 다행이었다.
미주 엄마와 아이스커피 한 잔씩 주문하고 앉아 지난 브런치 모임 때 있었던 엄마들 이야기를 꺼냈다.
"미주 엄마. 민주 학원 보내세요? 하은이가 미주는 학원 안 다니는 것 같다던데…. 대신 학교 쉬는 시간에 책을 엄청 열심히 읽는다고 하던데요. 어우 하은이도 책 좀 읽으면 좀 좋아요. 부러워요."
"에이 뭐 책이야 애들이 다 조금씩 읽는 정도죠. 미주도 안 읽고 놀 때는 한 장도 안 읽을 때도 있어요. 갑자기 자기가 꽂힌 책이 있으면 잠도 안 자고 읽지만요."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여유 있는 미소다. 분명 믿는 구석이 있는 거지. 오늘은 꼭 물어봐야겠다.
"저번 브런치 모임 때 엄마들 얘기 들어보니 학원을 안 보내면 안 되겠다 싶기도 하고 불안해지네요. 하은이는 피아노랑 수영만 보내고 제가 그림 그리는 거 조금씩 봐주기만 하는데…."
"저는 미주가 원치 않으면 안 보낼 생각이라 별로 흔들리진 않아요. 그리고 꼭 전부 공부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애들이 잘하거나 좋아하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날 엄마들 영어학원이니 뭐니 하는 소리 하은 엄마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브런치 모임도 그저 엄마들 얼굴 익히고 한두 번 인사 정도 하는 거로만 생각하시는 게 나아요. 모임 안 나간다고 친하게 못 지내는 것도 아니고 설령 전부 친해지지 않아도 한두 분 성향 맞으시는 분이랑 따로 커피 한잔하는 정도면 되죠. 뭐."
#다시 만난 영어의 세계
"아니 초등 입학 전부터 맘 카페에 브런치 모임에 못 끼면 아이가 혼자 논다 그러고 나중에 생일파티에 혼자 초대되지 못해 속상하기도 한다 그러길래요. 그리고 점점 커가면서 정보들도 주고받는데 나만 그때처럼 모르고 멍하니 있을 것 같아요."
미주 엄마에게는 그날 주고받은 말들이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른다는 걸 솔직하게 얘기했다. 왠지 그냥 미주 엄마한테는 다 얘기하고 기대고 싶어 진다.
"아~ 영어학원 말씀이시구나? 폴리 유치원이라고 영어유치원인데 초등학교 입학하면 학원이랑 연계되는 것 같아요. 폴리를 안 다닌 아이들은 따로 레벨 테스트를 받아야 되고요."
‘폴리가 영어유치원이구나. 레테가 레벨테스트고.’
말을 배워가는 아이처럼 하나씩 알아간다.
"아무래도 영어유치원에서 영어로 원어민들과 일상생활하던 아이들이라 발음이나 수준이 일반 유치원 다닌 친구들하고는 좀 차이가 나죠. 그래서 같은 또래 아이와는 같은 레벨의 반에서 공부하기 좀 힘든 거고요. AR 지수는 책에 포함된 어휘의 양과 난이도, 문장길이 등을 판단해서 읽기 실력을 학년별로 분류해 놓은 레벨이에요. k 레벨부터 1~13단계까지 나누어져 있어요."
나는 다시 만난 세계를 보듯 입을 반쯤 벌리고 고개만 끄덕였다.
"SR 지수도 함께 체크하는데 그건 읽기 수준 능력이라고 보시면 돼요. SR 점수가 10이라고 한다면 미국 공립학교 기준으로 10학년 수준의 읽기 능력이라고 볼 수 있죠."
벙어리 삼룡이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이다 연신 '쪽쪽' 소리를 내며 커피만 마셨다. 난 도대체 어느 세상에서 살다 온 건지. 처음엔 다른 엄마들이 다른 세상에서 온 거로 생각했지만 다들 알고 나만 모르고 있는 거라면 내가 다른 세상 사람인 게 틀림없다.
"미주 엄마는 공부 안 시킨다면서 어떻게 학원을 그렇게 잘 알아요? 설마 안 시킨다면서 엄청나게 공부시키는 거 아니에요? 하하하"
"하하하 그래 보여요? 뭐 저도 미주가 공부하겠다면 하라고 할 거예요. 그런데 미주는 절대 그런 소리는 안 할 것 같네요. 하하하.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책은 읽게 해요. 어려서부터 제가 읽어주고 같이 도서관 다니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책은 싫어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영어도 책으로 읽어주고 cd로 들려주다 보니까 읽기 레벨에 관해서 알게 되었어요."
#그냥 있어도 빛이 나는 사람
역시 미주 엄마한테 물어보길 잘했다. 그냥 학원만 보내려고 하는 엄마들과 확실히 뭔가 다르긴 다르다. 공부보다는 책을 읽히고 영어도 책 읽기로 시키고 있는 걸 보니 교육 가치관이 확실한 엄마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아이가 행복한 육아를 하는 것 같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타고났다고 신랑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학무모 총회 때 그 많은 엄마 사이에서 '콕'하고 미주 엄마를 집어낸 거 보면 말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콕'하고 집힐 만큼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명품백, 외제 차, 비싼 옷들로 시선이 가는 사람이 아닌 그냥 있어도 눈빛이 반짝이고 미소가 여유로운 사람. 나 다시 태어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