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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 Oct 28. 2022

(12화) 본전 뽑으려다 망한 유명한 전집 시리즈

중고책 읽는다고 사람이 후져지는 건 아니다.

# 나도 안데르센 동화책이 읽고 싶었다.


어릴 적 나는 많은 책을 접해 본 적이 없다. 좀 사는 집이나 집으로 찾아온 영업사원한테 안데르센 동화 전집 같은 걸 들이던 시대였다. 언니, 오빠들이 대학교, 고등학교에 줄줄이 다니는 우리집 형편에 부모님께 책을 사달라고 조르지 못했다. 내가 책을 좋아하지 않는 건 어릴 적 환경 탓이라고 여기면서 미주한테는 꼭 좋은 책들을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했던가. 지금까지 만났던 어린이집, 유치원 친구 엄마들은 아이 공부에 진심이었다.

아니 진심인 줄 알았다.   

   

 ‘학원은 어디가 좋다더라. 몇 살부터 영어를 시작해야 한다. 숫자는 학습지로, 한문은 몇 급, 책은 단계별로 어디 거 등등’     


옆에서 들으면서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에 항상 불안했다.  제일 만만하게 시작할 수 있는 학습지부터 알아보았다. 그러다 옆 동에 사는 유치원 친구 엄마가 독일 브랜드 교구를 시작으로 단계별로 전집을 들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아이와 교구를 가지고 노는 사진들과 함께  좋은 후기로 도배되어 있었다. 사면 나도 아이 발달에 신경을 쓰는 똑똑한 엄마가 될 것 같았다.    

  

#첫 교육투자


옆 동 엄마한테 소개받은 선생님이 상담을 왔다.

     

“어머니. 아이가 몇 살이에요?”     


“옆 동 OO이랑 같은 나이 4살인데요.”     


“아이고 그럼 교구 활용단계는 한참 늦으셨어요. 저희 프로그램은 아이의 다중지능 발달에 도움이 되는 교구부터 시작해요. OO인 교구하고 자연관찰 전집 들어갔고 조금 있으면 한글 들어가요. 하은이도 지금부터 주 1회 방문 선생님 오시는 거로 시작하면 충분히 가능해요.”   

  

‘뭐? 누가 봐도 하은이가 또래보다 손도 야무지고 말도 곧잘 하는데 OO보다 느리다고?’     


안 되겠다. 당장 시작해야지. 이러다간 정말 하은이는 놀이터 죽순이로 있다가 유치원에 들어가고 한글도 모르고 초등학교 입학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격을 들어보니 오기로 덤빌 게 아니다. 백 단위가 넘어간다. 남편은 그렇지 않아도 외벌이에 힘들어 죽겠는데 미쳤다고 소리부터 지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어릴 적 생각하면 하은이만큼은 꼭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게 하고 싶다.


어찌 내 마음을 알았는지 선생님이 밝게 웃으며 지금 결제하면 책장도 사은품으로 주고, 지인 소개로 5% 할인까지 해준단다. 게다가 12개월 무이자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 한 달에 이 정도는 충분히 투자해야지’


#본전이 생각난다.     


사은품으로 같이 온 4단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들과 맨 아래 칸에 자리 잡은 원목 교구들이 반짝인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하은이가 집중한 채 교구로 창의적인 모형을 만들고 한글을 척척 읽어 내려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아이 교육에 누구보다도 앞선 엄마가 된 느낌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며칠 가지 못했다. 하원하고 온 아이한테 교구를 내밀며     

 

“요렇게 요렇게 쌓아볼까요? 우와~ 너무 멋지다. 하은아 이걸로 엄마 뭐 만들어 줄 거야?”    

 

없는 애교 부려가며 하은이한테 교구를 내밀었더니 기대와는 달리 교구를 입에 넣었다가 있는 힘껏 던져서 TV 장식장 밑으로 데구루루 굴러 들어가 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부엌 싱크대 장으로 가더니 냄비 뚜껑과 채반을 꺼내 두드리며 소리를 내고 앉았다.


아니 이렇게 좋은 나무로 만든, 없는 모양 없이 교구가 꽉 차 있는데 쟤는 왜 맨날 냄비 뚜껑이랑 국자에 환장을 해서 없는 애처럼 저러고 있나 모르겠다.      


‘여기 들인 돈이 얼만데 어휴.’     


전집 그림이 환상적이라고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서 몇 번을 읽었다며 호들갑 떨던 블로그 속 엄마들은 영재들을 키우는가 싶다. 우리 애는 책 좀 읽어보자 그러면 책으로 성을 쌓아 그 속에 들어가 냄비를 두드리고 있으니 당최 바보를 키우나 싶고.     

본전 뽑으려면 아직 멀었다. 적어도 열 번 이상은 읽어줘야 하는데….


어린이집 친구 엄마들은 전집들이고 얼마 없어 학습지로 한글 시키고 영어 시키고 있던데 나는 늦어도 한참 늦었나 보다. 우선 들여놓은 전집 본전이나 뽑아야 다음 전집을 들이던지 할 텐데 속이 상한다.     


#중고 같지 않은 중고     


미주 엄마를 도서관에서 만나 돌아오는 길에 하은이 어릴 적 전집 사주고 혼쭐났던 얘기를 했더니 배를 잡고 웃는다.     


“하은 엄마만 그런 건 아니에요. 제 주변에도 많았어요. 그렇게 비싼 전집 들여서 본전 생각나서 주구장창 그 책만 읽으라고 하다가 애도 지치고 엄마도 지쳤다는 얘기 들었어요. 하은이가 제대로 놀이를 한 건데 아쉽네요. 집에 있는 다양한 물건들로 놀이하고 책으로 쌓기 놀이하는 게 책 읽기의 시작이에요. 조금만 더 갔으면 하은이는 엄청 책 많이 읽었을 텐데….”     


“그럼 미주는 어릴 때부터 전집 같은 책은 사주지 않으셨어요? 저렇게 책을 좋아하는데?”     


“당연히 사줬죠. 중고로 싼 거~ 그것도 아주 많이요. 벽 하나를 책장으로 채우고 거기에 책으로 다 채웠어요. 근데 매일 책을 읽긴 했는데 전집 책을 다 읽지는 않았어요.”    


 

중고 책을 사줬다니 의외였다. 책에 진심인 미주 엄마여서 책만큼은 아주 비싼 전집으로 사줬을 거로 생각했는데…. 미주 엄마가 개똥이네에서 깨끗하고 저렴한 전집을 여러 질 들여서 미주가 좋아하는 책만 읽고 또 읽혔다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때 그 어린이집 엄마들도 나처럼 비싼 전집들이고 애가 결국 잘 읽지도 않으니 학습지로 갈아탔던 게 아닐까 싶다.


전집이라고 1번부터 차례로 끝까지 읽지 않아도 그냥 두었고 같은 책만 수십 번 반복해서 읽은 책도 있다고 했다. 읽어주는데 그림만 보면서 다음 장으로 넘기면 넘기는 대로 아이 시선을 따라가며 읽었단다.


책제목을 말하고 책 뽑아오기 놀이하고 매일 책을 읽어주며 놀았더니 한글은 그냥 스스로 읽게 되었다니 입이 안다물어졌다.


'학습지 시킬 돈이 굳은거네'


본전은 무슨 아이한테 돈벌어왔다고 고마워해야할 판이다. 후회막심이지만 이제와서 어쩔거냐. 지금이라도 미주 엄마만나서 하은이도 책이란걸 읽게되었으니 감사해야지.


미주 엄마의 중고책 얘기는 계속되었다.

안 읽는 전집은 다시 개똥이네에 되팔고 또 전집을 들이길 반복했다고. 한두 권 빠진 전집은 중고 가격에서도 반이나 더 저렴하게 구매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부담없이 샀고 본전 생각이 안났다고.   

  

‘개똥이네가 뭐냐. 무슨 이름이 그러냐. 영어로 지은 멋진 이름들 놔두고. 개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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