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할 수 있는 건데 누구나 하지 않는 것
지금 내 기분은 꼭 카드 결제일 다음 날 같다. 한 달 잘 쓰고 잘 해결하고 다시 부자가 된 느낌. 내 돈은 항상 없는데 결제일 다음 날은 이상하게 카드를 쓰면서도 죄책감이 덜하다. 결제일이 다가올 땐 행여 생활비를 벗어날까 봐 신경이 곤두서 있다. 그때 드는 생각은 다음 월초부터는 꼭 아껴 써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이번만 잘 넘길 수 있길 빌어본다. 그러곤 다음날엔 치매 걸린 사람처럼 어제의 걱정스러운 마음은 눈 녹듯 사라지고 다시 채워진 한도에 기분이 좋아진다. 어제 죽을 듯이 나락으로 떨어지던 기분은 온데간데없고 미주 엄마가 내민 손을 잡고 벼랑 끝에서 올라와 새 삶을 사는 기분이다. 이제 정말 열심히 살아보자고 다짐해 본다.
그나저나 급한 불은 껐지만 예빈 엄마에게 독촉하긴 글렀다. 본인도 해결방법이 없으니 자존심 다 구기고 나한테 배 째라고 했겠지. 이제 내가 누군가와 돈거래를 한다면 정말 사람이 아니다. 그럴 돈도 없지만, 또 한다면 호구나 다름없으니 그냥 머리 밀고 절에 들어가 나물만 먹으며 사람이 될 때까지 죽비로 때려달라 해야 할 거다.
세상 어지러웠던 머릿속을 진한 커피 한잔으로 다 씻어 내리고 있다. 하은이가 학교를 마치고 오더니 도서관에 가야 한다며 재촉했다. 반쯤 남은 커피가 아깝지만, 자발적으로 저렇게 도서관에 가겠다고 나서는 모습을 처음 본 나는 눈이 동그래져 허겁지겁 따라나섰다.
“왜 갑자기 도서관?"
" 어~ 미주가 도서관 옥상 휴게실에서 간식 먹자고 가방 놓고 만나기로 했어.”
‘그럼 그렇지. 어쩐 일로 책을 읽으러 도서관에 가시나 했네. 이제 뭐 드시면서 놀러 도서관까지 가신다고…. 에휴 어려운 걸음 하신다 진짜!’
도서관에 도착해 1층 아동열람실에 갔더니 미주 엄마와 미주가 와 있었다. 웃으며 조용히 눈인사를 나누는데 빚을진 을의 처지라 그런지 나도 모르게 눈이 한껏 더 반달이 되게 웃었다.
아이들이랑 미주 엄마랑 도서관 옥상으로 올라갔다. 밝은 해가 내리쬐는 넓은 나무 테이블에 예쁜 꽃들이 심어진 화단이 있는 이런 옥상 휴게공간이 있는 줄도 몰랐다.
애들 테이블에 미주 엄마가 싸 온 과일과 떡꼬치를 간식으로 꺼내 주고 우린 자판기 커피 한 잔씩 뽑아 들고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10년 만에 먹어보는 자판기 커피 같다. 커피는 향만 느껴질 뿐 달고 또 달았다.
“도서관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야외에 바람도 시원하고 좋네요.”
“그쵸. 미주가 도서관에 오는 걸 좋아하게 만들려고 어렸을 때부터 꼭 간식을 싸 와서 둘이 여기서 먹었어요.”
커피를 마시며 미주가 도서관을 제집 드나들 듯 다니며 책을 읽게 된 사연을 듣고 있자니 한석봉 엄마는 저리 가라다. 참새가 방앗간을 다니듯 매일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 간식을 먹었다고 한다. 처음엔 책도 안 읽고 그냥 간식만 먹고 간 날도 많았고 그냥 책들만 휙 쳐다보다 간 날도 많았단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아도 언제든 미주가 집으로 가자고 하면 그냥 집으로 갔다고 한다. 대신 매일매일 그냥 도서관에 들렀다고 했다. 간식과 함께.
그러다 보니 점점 도서관에 머무르는 날이 많아지고 시간도 점점 늘고 한 페이지가 한 권이 되고 한 권이 열 권이 되었다. 책에 빠져든 날은 저녁 시간이 다 되어도 일어나지 않아서 남편보고 대충 저녁 챙겨 먹으라고 문자 보내 두고 같이 도서관에 있었다니 들으면서 입이 떡 벌어졌다.
“책을 그냥 많이 읽고 좋아하게 되는 경우는 드물어요. 대신 어떤 아이든 책을 좋아하게 만들 수는 있어요. 어쩌면 아이들은 원래 이야기를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도서관이 절대 답답하고 재미없는 곳이라고 느껴지면 안 돼요. 도서관에 갔다 오는 길엔 간식을 먹든 좋아하는 문구를 하나 사든 즐거운 일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절대 강압적으로 몇 권 읽어라 하지 말아야 하고. 그렇게 즐겁게 꾸준히 습관처럼 다니다 보면 언젠가 아이 발걸음이 저절로 그냥 도서관으로 가고 있어요.”
나는 미주가 원래 책을 좋아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주 엄마는 복 받았네’ 생각하며 부러워했다. 그런데 얘기를 듣다 보니 그 방법이란 거 참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원래 그런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비법 같은 건 알고 보면 별거 없고 쉬워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건데 누구나 하지 못하기도 한다. 갑자기 옥상에서 마시는 자판기 믹스커피가 카페테라스에서 마시는 고급 아인 슈페너처럼 부드럽고 달게 느껴졌다.
미주 엄마와 얘기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품위가 있다. 다른 아줌마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학원정보 얘기로 시작해서 남 얘기에 결국은 자기애들 자랑으로 끝난다. 헤어져서 집으로 갈 때 기분은 항상 허무하고 내 아이를 떠올리며 한숨이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뒹굴뒹굴하며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면 더더욱 속이 상해 괜히 ‘할 일 다 하고 그러고 있는 거야?’ 소리나 지르게 된다.
도서관 옥상에서 둘이 책 하나를 함께 넘겨보며 조잘대며 웃는 아이를 보니 그렇게 사랑스럽고 예쁠 수가 없다. 책을 읽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원래 저렇게 예쁘고 잘 웃는 딸이었구나 싶다. 어릴 땐 그렇게 바라보았던 것 같은데 학교 입학했다고 갑자기 내가 불안해져서 공부 안 하고 책 안 읽는 아이 등만 바라보며 화가 나 있었던 것 같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몇 권을 옆구리에 끼고 하은이 손을 잡고 집으로 오는 길도 카드 결제일 다음 날처럼 가볍다. 빵집 옆을 지나다가 내일 하은이 아침으로 줄 겸 빵을 사러 들어갔다. 부드러운 우유 식빵 하나랑 신랑 좋아하는 달달한 밤이 콕콕 박힌 밤식빵도 하나 집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심심한 치아바타랑 고로케까지 넣었더니 어느새 쟁반이 무겁다. 하은이가 저쪽에서 커다란 무지개 회오리 막대사탕을 들고 사도 되냐고 묻는다.
‘먹어봐야 설탕 맛인데…. 빵이나 하나 더 살 것이지. 다 큰애가 막대사탕이 뭐야.’
그렇지만 오늘은 하은이가 도서관에 스스로 간 기념비적인 날이다. 게다가 카드 결제일 다음 날의 기분 아닌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은이도 놀라 잠시 입을 벌렸다가 이내 활짝 웃는다.
‘아. 월초부터 정신 차리고 살기로 했는데…. 그래 오늘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