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영광의 부활을 꿈꾸다

12장) 현실성의 정복 - 15세기 초

by 아이얼

로마제국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새 시대의 갈망


이제 과거 로마제국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15세기 르네상스 시대다.

르네상스라는 말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왜 '재생' 또는 '부활'이라는 의미의 단어를 한 시대를 대표하는 타이틀로 부쳤을까?

간절하게 회복하고 싶은 그 무엇!

이전의 명예와 자존심을 되찾고 싶어 했던 당시 로마제국 후예들의 심정을 헤아려보게 된다.

과거 로마인들이 야만족이라 부르며 무시했던 고트족들. 그들에게 패하여 멸망한 로마제국은 당시 번영을 누리던 곳곳에 건축되고 장식되는 모든 미술품들에 '고트족의 양식 - 고딕 스타일'이라 명명(命名)하였었다.

그러나 처음의 이런 명칭이 무색하게...

소위 야만족의 미술인 고딕 미술은 아름답고 화려하며 날로 세련되어갔다.

알프스 북쪽의 예술 - 고딕 스타일은 당시 앞서가는 예술의 총체였던 것이다.


“고대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부흥시켜 새로운 예술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이러한 염원이 일고 있었다.

그 중심지는 단테와 조토의 출생지이며 부유한 상업 도시인 이탈리아의 피렌체였다.

바로 이곳에서 일단의 미술가들이 과거의 미술 개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술 창조를 시도하고 계획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미술가들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 새로운 건축 방법의 창조


이들 젊은 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는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lippo Brunelleschi : 1377-1466)였다.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대성당을 완성시키는 일을 맡고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고딕식 교회 건축법을 익히 아는 그로서는 알고 있는 그대로 지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피렌체 사람들은 그들의 성당을 거대한 돔(dome)으로 덮기를 원했다. 이에 브루넬레스키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새로운 교회나 다른 건물의 설계를 요청받았을 때 전통적인 양식들은 모두 다 버리고 로마의 영광이 부활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시안을 채택하기로 결심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로마를 여행하며 신전과 궁전의 유적들을 측량하고 건물들의 형태와 장식들을 스케치했다고 한다... 그가 목표했던 것은 새로운 건축 방법의 창조였으며 그러한 의도 내에서 고전 건축의 형식들을 새로운 조화와 미를 창조하는 데 자유로이 이용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의 연구는 성공하였고 피렌체 대성당의 돔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설계. <피렌체 대성당의 돔). 1420-36년경.


브루넬레스키의 업적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실제로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그 뒤로 거의 500년 가까이 유럽과 미국의 건축가들은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도시나 마을에 가든 열주(列柱)나 박공(博 拱, pediment)과 같은 고전적인 형식을 이용한 건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몇몇 건축가들이 브루넬레스키의 방침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고 브루넬레스키가 고딕 전통에 반기를 든 것처럼 르네상스식 전통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은 금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 건축되고 있는 대부분의 주택들, 건물들에서 여전히 당시 형식의 잔재를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의식 있는 한 미술가의 열정의 결실이 당대뿐 아니라 현대에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브루넬레스키! 미술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인물이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설계. <파치 예배당 전경> 1430년경, 피렌체


이는 그가 피렌체의 명문가인 파치 가를 위해서 지은 작은 예배당의 정면이다.

옛 그리스 로마식 신전의 모습도 아니지만 당시 유행이던 고딕식 모습은 더더욱 아니다.

다음 예배당의 내부를 보면 그 차이가 더욱 현격하게 드러난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설계. <파치 예배당 내부> 1430년경


브루넬레스키는 원주와 벽기둥과 아치를 자기 식대로 결합해서 그 이전의 건물과는 전혀 다른 경쾌하고 우아한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고전적인 박공을 가진 문틀과 같은 디테일을 보면 브루넬레스키가 얼마나 주의 깊게 판테온과 같은 고대의 유적들을 연구했는지 알 수 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가 로마의 형식들을 어떻게 연구했는지를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밝고 균형이 잘 잡힌 실내에서는 고딕 건축가들이 그처럼 높이 평가했던 특징들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높은 창문도 없으며 가느다란 기둥도 없다. 그 대신 건물의 구조상 실질적인 기능을 하지 않지만 고전기의 '기둥 양식'을 본뜬 회색 벽기둥들이 아무 장식도 없는 흰 벽을 구획하고 있다. 브루넬레스키는 다만 내부의 형태와 비례를 강조하기 위해서 벽기둥 들을 거기에 설치했던 것이다.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미술의 영역에 있어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발견으로 그 뒤 수백 년 간 미술을 지배했던 원근법 (遠近法, perspective)의 발견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단축법(短縮法, foreshortening)을 이해했던 그리스 미술가들이나 공간의 깊이를 능숙하게 표현했던 헬레니즘 미술가들조차도 물체가 뒤로 물러갈수록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그 크기가 작아진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었다.


천재 화가 '마사초'


마사초, 성 삼위일체, 성모, 성 요한과 헌납자들>. 1425-8년경. 프레스코, 667 ×317 cm, 피렌체 산타 마리아노벨라 교회


조각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브루넬레스키의 영향을 받은 마사초의 작품이다. 각 인물들을 원근법적인 틀 아래 배치함으로써 더욱 현장감이 느껴진다. 이 작품 역시 미술사의 새 장을 연 조토의 그림과 한 맥을 이으며 발전해나갔음을 느끼게 된다.

만약에 피렌체 사람들이 유럽의 다른 지 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시 피렌체에서도 유행했던 국제 양식 같은 것을 기대했다면 틀림없이 실망했을 것이다. 그들이 본 것은 섬세한 우아함이 아니라 큼직하고 육중한 인물들이었으며, 유려한 곡선이 아니라 건장하고 모가 진 형상이었고, 꽃이나 보석 같은 고상한 세부 묘사 대신에 유해를 안치하는 황량한 지하 납골소였다.
마사초의 작품이 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그림들보다 시각적인 즐거움을 덜 주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훨씬 더 진지하고 감동적인 것이 있었다... 성모가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을 손으로 가리키는 단순한 제스처는 엄숙한 이 그림 전체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움직임이기 때문에 대단히 웅변적이고 인상적이다.



위대한 조각가 '도나텔로'


브루넬레스키의 일파 중 가장 위대한 조각가는 피렌체의 대가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였다.

그는 마사초보다 나이가 15살이나 많았지만 더 오래 살았다.


다음은 그의 초기 작품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무기 제조자들의 조합이 주문한 것으로 그들의 수호성인인 성 게오르기우스를 묘사한 것으로 피렌체의 한 교회(오르 산 미켈레) 외부의 벽감(壁) 속에 세워두기 위해 만든 것이다.


도나텔로, 성 게오르기우스>),1415-16년경. 오르 산 미켈레 의대리 석상, 209 cm,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 박물관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조지)> 상은 한치라도 양보하지 않을 결심을 한 사람처럼 두 다리를 굳건하게 땅에 박고 당당하게 서 있다. 그의 얼굴에는 중세의 성인들이 가지고 있던 망연하고 고요한 아름다움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활력과 집중감으로 넘쳐 있는 것만 같다. 방패 위에 손을 얹고 마치 적이 접근해오는 것을 주시하는 듯한 그의 모든 태도는 도전적인 결의로 긴장된 것처럼 보인다.

이 조각상은 젊음의 혈기와 용기를 매우 탁월하게 표현한 모습으로 지금도 언급될 만큼 유명하다. 우리는 도나텔로의 이러한 상상력뿐만 아니라 이 무사 다운 성인을 이처럼 신선하고 신빙성 있게 시각화한 그의 탁월한 재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조상은 그것이 풍겨주는 생명감과 운동감에도 불구하고 그 윤곽이 분명하고 바위와 같이 단단하다. 마사초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도나텔로는 그의 선배들의 우아한 세련미를 새롭고 힘찬 자연의 관찰로 대치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성인의 두 손이나 눈썹 같은 세부 묘사는 전통적인 모델에 전혀 의존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며 인체의 실제 모습을 참신하고 확고하게 연구하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15세기 초 피렌체의 거장들은 중세의 미술가들로부터 물려받은 낡은 공식을 반복하는 것으로 더 이상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이 찬미했던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작업실이나 공방에서 모델이나 동료 미술가들에게 자기들이 원하는 자세로 포즈를 취해줄 것을 요구함으로써 인체에 관한 탐구를 시작했다. 도나텔로의 작품을 그처럼 뚜렷하게 사실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준 것도 바로 이러한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관심이었다.


도나텔로, 헤롯 왕의 잔치, 1423-7년, 청동에 금도금, 60x60 cm, 시에나 대성당 세례당(洗禮堂)의 세례반 부조

도나텔로는 생존할 당시에 굉장한 명성을 얻었다. 백 년 전의 조토와 같이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로 불려 다니며 그 도시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이 부조는 <성 게오르기우스> 보다 약 10년 뒤 시에나 성당의 세례반을 위해서 만든 청동 부조이다. 이전에 소개했던 중세 세례반처럼 이것도 세례 요한의 생애 중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살로메 공주가 헤롯 왕에게 춤을 춘 대가로 세례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요구하여 그것을 받는 끔찍한 순간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서도 원근법의 형식이 적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장에 있는 각 인물들의 몸짓이 격렬하고 섬뜩하다. 도나텔로는 본인이 상상한 그대로를 거르지 않고 표현해내고 있다.



알프스 북쪽의 미술가들


과학과 고전 미술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은 얼마 동안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전유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것보다 더 자연에 충실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려는 정열적인 의지는 알프스 북쪽에 사는 같은 세대의 미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부르고뉴 공국의 조각가 '클라우스 슬뤼테르'


피렌체에서 도나텔로의 세대가 국제 고딕 양식의 섬세함과 세련미에 싫증을 느끼고 보다 힘 있고 장중한 인물상을 창조하기를 갈망했던 것과 같이, 알프스 북쪽에서도 한 조각가가 그의 선배들의 섬세한 작품들보다는 실감 나고 보다 솔직한 미술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이 조각가는 클라우스 슬뤼테르(Claus Sluter)로 당시의 부유하고 번창하는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 디종(Dijon)에서 1380년경부터 1405년 까지 일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 중 '한 유명한 순례지에서 샘을 표시하는 커다란 십자가 밑부분을 이루는 예언자 군상'이 있다.


클라우스 슬뤼테르, <예언자 다니엘과 이사야〉모세의 샘의 부분, 대좌를 뺀 높이 360 cm, 디종 샤르트뢰즈 드 1396-1404년, 석회석, 상몰 예배당

그 예언자들은 예수의 수난을 예언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각각 손에 그런 예언이 새겨진 커다란 책이나 두루마리를 들고 서서 앞으로 닥쳐올 비극을 묵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의 인물상들은 고딕 성당 양편에 서 있는 엄숙하고 딱딱한 인물상과 다르다. 이들은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와 마찬가지로 옛날 작품들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운데 터번을 머리에 감고 있는 사람이 다니엘이고, 오른쪽 모자를 쓰고 있지 않은 사람이 늙은 예언자 이사야이다. 실물보다 크게 세워진 모습은 조각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중세 종교극 무대에 지금 막 서려는 인상적인 등장인물들 같다. 디테일한 표정과 몸짓, 의상과 소품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작가의 예술 감각이 놀랍다.



벨기에의 화가 '얀 반 에이크'


그러나 북유럽에서 사실성의 정복을 최종적으로 완수한 사람은 조각가가 아니 었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것을 표현한다고 느껴지는 혁명적인 창의성을 보인 사람은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 1390?~1441)였다. 슬뤼테르와 마찬가지로 그는 부르고뉴 공국의 궁전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대부분 현재의 벨기에로 옛날에는 네덜란드에 속해 있던 지방에서 일을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플랑드르 헨트 시에 있는 여러 장면이 그려진 거대한 제단화이다.


얀 반 에이크, <날개가 접혀진 헨트 제단화 1> 1432년. 패널에 유채, 각 패널 146.2x 51.4 cm, 헨트, 성 바보(St Bavo대성당
얀 반 에이크, <날개가 펼쳐진 헨트 제단화 2>,1432년. 패널에 유채, 각 패널 146.2x 51.4 cm, 헨트, 성 바보(St Bavo대성당


이 작품은 얀보다는 덜 알려진 그의 형 휘버트(Hubert)가 시작해서 1432년에 얀이 완성했다고 한다. 1432년이라면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마사초와 도나텔로의 걸작들이 완성된 그 무렵이다.


많은 장면들을 담고 있는 이 제단화는 위 그림처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축제날이면 펼쳐 그 빛나는 색채를 드러낼 수 있었고(도판 2), 주간에는 접혀서 다소 칙칙한 외관(도판 1)을 보여주었다.

조토가 아레나 예배당에 선과 악에 대한 형상들(10장 참조)을 그려놓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과 복음서 저자 요한이 입상의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그 위로 그동안 주욱 보아왔던 친숙한 장면인 수태 고지의 순간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반 에이크의 새로운 '세속적인' 표현 방식을 감지해볼 수 있다고 하는데... 글쎄 내 눈에는 전반적으로 풍성한 부피감의 의상에 하염없는 눈빛으로 앞을 응시하는 성모 마리아의 자태가 아름답게만 여겨진다.


펼쳐진 제단화 양끝에 나체로 서있는 아담과 이브

무엇보다도 반 에이크의 새로운 미술 개념을 보여 주는 부분은 양 날개 부분의 안쪽에 그린 이 타락 이후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다.

성경에는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야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라고 적혀 있다. 그들은 손에 든 무화과 잎사귀만 아니면 정말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이다.

바로 이 점이 당시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 전통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던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 대가들과 대치되는 부분이다.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이 존경했던 고대 미술가들은 밀로의 비너스나 아폴론 벨베데레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물의 형상을 '이상화'했다. 그러나 반 에이크는 이런 것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벌거벗은 모델들을 그의 앞에 세우고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정직하게 묘사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말 충격적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브의 나신은 유독 시선을 끈다. 툭 튀어나온 배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한다.


위 제단화의 세부


위 제단화의 세부

- 북유럽과 이태리 세밀화의 차이 -


위 제단화의 세부
#비교#랭부르 형제의 세밀화. 1410년경
반 에이크의 그림에 나타난 자연에 대한 그의 관찰은 앞장에 소개된 랭부르 형제보다 더 세밀했고, 세부 묘사도 훨씬 정확했다. 그림의 배경에 있는 건물과 나무들이 이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랭부르 형제의 나무는 상당히 도식화되어 있고 인습적이다. 그들의 풍경은 실제의 광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배경이나 태피스트리처럼 보인다. 이 모든 것이 반 에이크의 그림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위 그림에서 진짜 나무를 보고, 도시로 이어지는 실제 풍경과 지평선 위에 있는 성을 본다. 바위 위의 풀이나 가파른 돌산에 자라는 꽃들을 그리는 데 들인 무한한 인내는 랭부르 형제가 그린 세밀화의 장식적인 덤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반 에이크는 그의 그림의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도 정확하게 재현하는 데 골몰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말의 갈기에 있는 털이나 말 탄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의 모피 장식의 터럭 수효까지도 다 셀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랭부르 형제의 세밀화에 나오는 백마는 어딘가 목마처럼 보인다. 반 에이크의 말도 형태와 자세는 이와 흡사하나 이 말은 살아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그 말의 눈에 어린 빛이나 가죽의 주름까지도 볼 수 있다. 랭부르의 말은 거의 평면적으로 보이는 데 반해 반 에이크의 말은 명암으로 입체감을 자아낸다.


우리가 북유럽의 미술이 발전해나간 방식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자연에 대한 반 에이크의 무한한 주의력과 인내력을 높이 평가해야만 할 것이다. 그와 같은 세대의 이탈리아의 미술가들, 예컨대 피렌체의 브루넬레스키 주변의 거장들은 자연을 그림 속에 거의 과학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묘사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들은 원근법적인 선으로 틀을 짜는 것으로 시작해서 해부학과 단축법의 법칙에 관한 지식을 통해 인체를 구축해갔다. 반면 반 에이크는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그림 전체가 가시적인 세계의 거울처럼 될 때까지 끈기를 가지고 미세한 세부까지 묘사하면서 자연의 환영을 만들어냈다.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미술은 이런 면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차이를 보여왔다. 물건이나 꽃, 보석 또는 천의 아름다운 표면을 묘사하는 데 뛰어난 작품들은 대개 북유럽 화가, 특히 네덜란드의 화가가 그린 것이고, 반면에 대담한 윤곽선과 원근법이 명확하며 인체의 아름다움을 확실하게 파악한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의 약혼), 목판에 유채, 81.8 ×59,7 cm, 런던 국립 미술관 1434년.
위 초상화의 세부


반 에이크의 미술의 탁월함은 초상화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그의 유명한 초상화 중 하나인 이 그림은 장사차 네덜란드에 왔던 이탈리아의 상인 조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rnolfini)와 그의 신부 잔느 드 쉬나니(Jeanne de Chenany)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에서의 도나텔로나 마사초의 작품 못지않게 새롭고 혁명적인 것이었다.


여기에는 온갖 것들이 다 있다. 카펫과 슬리퍼, 벽에 걸려 있는 묵주,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솔, 창틀 위에 있는 과일 등...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가 아르놀피니 부부의 집을 직접 방문한 것만 같다. 이 그림은 아마도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엄숙한 순간, 즉 그들의 약혼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젊은 여인은 그녀의 오른손을 아르 놀피니의 왼손 위에 얹었고 아르놀피니는 그들의 결합의 엄숙한 표시로서 그의 오른손을 그녀의 왼손 위에 놓으려는 순간이다. 이와 비슷한 엄숙한 행위의 현장에 있었다고 증언하는 공증인과 같이!


아마도 이 화가는 한 사람의 증인으로서 이 중요한 약속을 기록해달라고 요청을 받았을 것이다. 이 거장이 그림에서 눈에 잘 띄 는 곳에 라틴어로 Johannes de eyck fuit hic(얀 반 에이크가 입회했노라)'라고 그 의 이름을 써넣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뒤의 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서 그 장면이 모두 반영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화가이자 증인인 반 에이크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림을 이런 새로운 방법으로 이용하는 것을 생각해낸 사람이 이탈리아의 상인인 아르놀피니인지 아니면 북유럽의 미술가 반 에이크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가가 한 사건에 대한 완전한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스위스의 화가 '콘라드 비츠'


북유럽의 혁신적인 미술가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사람으로 스위스 화가 '콘라드 비츠'를 들 수 있다.

다음은 그가 1444년에 제네바시를 위해 그린 제단화의 일부분이다.


콘라드 비츠, <제자들로 하여금 고기를 잡게 하신 기적>, 목판에 유채, 1444년, 제단화의 패널, 132x154 cm, 제네바 박물관


이 그림은 요한복음 21장의 예수님이 부활해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장면이다.

이 장면의 특이점은 사건의 배경이다. 성경에 언급된 디베랴 호수가 아니라 당시 지역주민들이 다 알고 있는 제네바 호수를 그린 것이다. 이렇게 실제 풍경을 그림으로써 더욱 친숙하게 다가온 구원자 예수님의 존재감!

이 그림을 바라보는 스위스 지역 성도들은 당장이라도 그들 앞에 나타나서 위로와 구원을 주실 예수님을 상상하며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10장에서 피렌체의 화가 '조토'로부터 미술가들의 시대가 열렸다고 설명했었다.

과연 오늘 읽은 12장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은 미술가들을 중심으로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새 시대는 새로운 환경이나 사건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벗어나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는 사람들의 치열한 몸짓으로 열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르네상스 시대는 옛 로마제국 영광의 부활을 꿈꾸는
피렌체의 미술가들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 르네상스 >
새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군단들'
그들의 행보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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