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하고, 실험하고, 계승하고...

13장) 전통과 혁신 1 - 15세기 후반 : 이탈리아

by 아이얼

미술가 집단의 탄생 - 탐구하고 실험하고 계승하다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5세기 초 이탈리아 미술의 부흥을 일으킨 브루넬리스키 군단과 벨기에 플랑드르(Flanders)의 미술가 얀 반에이크를 중심으로 이룩한 새로운 미술사적 발견들은 유럽 전역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이제 미술은 '성경의 이야기를 감동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임무'에서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현실 세계의 한 단면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데에도 미술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획기적인 사고방식은 당시 화가들과 후원자들을 흥분시켰다.

그들은 이러한 작업들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유럽 곳곳에 흩어져있던 미술가들이 유명한 미술가들을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새록새록 새롭고 놀라운 효과를 얻기 위해서 집단적인 실험과 탐구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집단적 행동을 시행할 수 있었을까?

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유럽사회의 흐름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대략 1400년까지는 유럽 각지의 미술이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해갔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과 부르고뉴 등지의 지도적인 거장들의 목적(교회의, 교회를 위한, 교회에 의한 미술)이 모두 다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양식은 '고딕 양식'이기도 하지만 '국제적 양식'이었다. 이는 예술의 영역뿐만 아니라 학문과 정치 세계에도 적용된다. 중세의 학자들은 모두 라틴어를 말하고 쓸 줄 알았다. 그렇기에 파리나 파도바나 옥스포드나 어떤 대학에서든 배우고 가르치는데 별로 개의치 않았다. 중세의 미술가들도 훌륭한 거장이라면 이 건축 현장에서 다른 현장으로 옮겨 다니며 작업할 수 있었고, 한 수도원에서 추천받아 다른 수도원으로 갈 수도 있었으며, 그의 국적이 어디인지 물어보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즉 특정한 민족과 국가를 옹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4세기 중세 말기에 이르러 시민과 상인들로 구성된 도시가 발전하게 되자, 이러한 생각들이 점차 변해갔다. 상인들은 모두 그들이 태어난 고향의 말을 했고, 타국의 경쟁자나 침입자들에게 일치단결해서 대항했다. 각 도시는 교역과 산업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지위와 특권에 자부심을 갖고,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도시들이 큰 세력을 얻게 되자 미술가들도 길드(guild)를 조직했다. 이 길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오늘날의 예술단체와 유사하다. 길드의 임무는 조합원의 권리와 특권을 보호하고 그들의 제작품을 판매하기 위한 안전한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5세기에는 미술이 각기 다른 여러 '유파(流派, school)'들로 분열되어 이탈리아, 플랑드르, 독일 등지의 모든 도시나 마을에는 그 나름의 '회화 유파가 생겨났다.


한 소년이 화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거장 밑에 견습생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는 그 거장의 집에서 먹고 자며 주인집의 심부름도 하면서 가능한 한 모든 면에서 쓸모 있는 일꾼으로 성장해야 했다.

견습생이 처음에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스승이 사용할 물감을 개거나 나무 패널이나 캔버스를 준비해두는 것이었다. 점차 그에게는 깃대를 그리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이 주어지게 된다. 그런 다음 어느 날 스승은 견습생 제자에게 작품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 예를 들어 이미 윤곽을 그려놓은 곳에 색칠을 하거나 그 장면에 나오는 구경꾼들의 옷을 마무리하는 그런 일을 주게 된다. 만약 그때 그가 재능을 보였다면 점차로 보다 더 중요한 일, 즉 스승의 스케치를 가지고 그의 감독하에 그 그림 전체를 완성시키는 것과 같은 일이 주어지게 된다.


이렇게 생겨난 것이 15세기 '회화의 유파'들이었다. 회화 유파들이란 훌륭한 미술가의 학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 도시의 스승들이 그들의 기술과 경험을 제자들에게 전수해주는 이런 방법은 이런 도시의 '회화 유파'가 어떻게 해서 그처럼 분명한 독창성을 발전시켰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15세기의 그림은 그림 자체만 보아도 그것이 피렌체의 것인지 또는 시에나인지, 디종 또는 브뤼주, 쾰른 또는 비엔나의 것인지를 식별할 수가 있다.



피렌체 유파(流派 - School) 이야기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 1404-1472)


르네상스의 문을 연 피렌체의 거장 브루넬레스키의 기본 생각은 그가 로마 유적에서 복제한 원주, 박공, 처마 장식 띠(comice)와 같은 고전적인 건축 형식들을 도입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그의 교회 건물에 이런 형식들을 응용했다. 그의 후계자들은 이런 그를 따라 연구하고 모방했다.


브루넬레스키의 제자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설계한 '성 안드레아 대성당'을 보자.

그는 이 교회의 정면을 로마풍의 거대한 개선문처럼 구상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르네상스 교회: 안토바의 성 안드레아 대성당> 1460년경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스타일을 재래의 주택과 궁전에 적용시킬 수는 없었다.

벽과 창문을 가진 재래의 집과 브루넬레스키가 권장한 고전적인 양식을 어떻게 절충시키느냐가 관건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고안해낸 자 역시 '알베르티'였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피렌체의 루첼라이 대저택, 1460년경


알베르티가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루첼라이(Rucellai) 집안을 위해서 이 대저택을 지었을 때 그는 통상적인 3층 건물로 설계했다.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의 계획에 따라서 정면을 장식하는 데 고전적인 형식을 사용했다. 그는 원주나 반 원주를 세우는 대신에 건물의 구조를 변경시키지 않으면서 고전적인 기둥의 양식을 암시하는 판판한 벽기둥(pilaster)과 엔타블레이처(entablature)를 그물처럼 엮어서 건물 전체를 덮었다.

그는 이러한 원리를 스승 브루넬리스키로부터 전수받았을 것이다.

콜로세움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에서도 제일 아래층에서는 도리아식, 그 위는 이오니아식 기둥 양식을 채택하고 있고, 벽기둥 사이에는 아치를 배치하고 있다.

알베르티는 고딕 스타일의 '야만적인(?)' 첨형 아치를 부드럽게 만들고, 국제화된 고딕식 설계 방식을 살짝 틀어서 새로운 고전적 형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새로운 것과 낡은 , 고딕 전통과 근대적인 양식 사이의 절충은 15세기 중엽의 이탈리아 거장들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 1378-1455)


다음은 도나텔로와 같은 세대의 조각가인 로렌초 기베르티의 부조물이다.

11장에 언급한 '도나텔로'가 만든 부조물 <헤롯왕의 잔치>가 있는 시에나 대성당의 동일한 세례반을 위해서 만든 부조 가운데 하나이다.


로렌초 기베르티, <세례 받는 그리스도> 1427년. 청동에 금도금 60x60 cm, 시에나 대성당 세례당의 세례반 부조


도나텔로의 작품과 달리 기베르티의 이 작품을 처음 보아서는 그렇게 놀랄 만한 것이 없다. 이 장면의 구성은 9장에서 살펴보았던 12세기 리에주의 유명한 놋쇠 주물 공의 배치 방식과 많이 다르지 않다. 예수는 세례 요한과 구원의 천사들을 데리고 중앙에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와 비둘기는 하늘에 새겨져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아름다움과 겸손함, 광야에서 해방된 예언자 세례 요한의 엄숙하고 힘찬 몸짓, 기쁨과 놀라움으로 서로 조용히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천사들...

도나텔로가 성경의 장면을 극적으로 표현해서 그 전 시대의 자랑거리였던 명료한 배치 방식을 뒤엎어놓은 반면, 기베르티는 보다 명확하고 절제 있게 표현하고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도나텔로처럼 실제 공간을 묘사하지 않는다. 모호한 배경에서 암시만 주고, 주요 인물들이 뚜렷하게 드러나 보이도록 표현했다.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 1387-1455)


피렌체 부근 피에솔레(Fiesole)의 위대한 화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 1387-1455)도 종교 미술의 전통적인 이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마사초의 새로운 방법들을 응용했다.

프라 안젤리코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수사(修士)로서 그가 1440년경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 그린 이 프레스코화는 <수태 고지> 그림이다.


프라 안젤리코, <수태 고지>, 1440년경. 프레스코, 187 × 157 cm, 피렌체 산 마르코 미술관


성처녀가 무릎을 꿇고 있는 회랑(回廊)은 마사초의 유명한 프레스코화(11장 참조)의 둥근 천장만큼 실감 나게 표현되었다. 14세기의 시모네 마르티니 (11장)처럼 그는 단지 성화를 아름답고 단순하게 그리고 싶었을 뿐이다.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에는 거의 운동감이 없으며 실재의 단단한 인체를 암시해주는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그림이 지닌 겸손한 분위기 때문에 더욱 거룩한 느낌을 자아내 감동을 준다.


이 위대한 미술가의 경건함과 겸손함!

그가 브루넬레스키와 마사초가 미술에 도입했던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인 새로운 표현법을 과시하지 않았던 이유였던 것이다.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 : 1397-1475)


또 한 사람의 피렌체 화가로 파올로 우첼로가 있다.

다음은 영국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전쟁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파올로 우첼로, <산 로마노의 대승>,1450년경. 피렌체 메디치 궁의 실내 장식화로 추정, 목판에 유채, 181.6x320 cm, 런던 국립 미술관


이 그림은 피렌체의 상인 중 가장 권력 있고 부유한 메디치가(Medici 家)의 대저택 실내 벽판에 걸도록 제작된 것이다. 이 장면은 당시 피렌체 군대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와 벌였던 전투 중의 하나로 1432년 그들의 적을 통쾌하게 짓밟았던, 산 로마노의 대승(大勝)을 그린 것이다. 갑옷에 길고 무거운 창을 들고 마치 마상 경주에 출전하는 것 같은 기사들의 모습은 중세의 기사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말과 사람들이 마치 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들처럼 보이고 쾌활한 분위기도 전쟁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같이 보인다. 그는 인물들이 마치 조각된 것처럼 돌출되어 보이도록 표현했다.


우첼로는 당시 브루넬리스키의 원근법 발견에 너무도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밤낮으로 사물을 단축법으로 그려보면서 그림 연습을 거듭했다고 전해진다. 화면 전체에서 그가 원근법과 단축법에 대해 얼마나 고심했었는지 그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 : 1421-1497)


한편 프라 안젤리코의 제자임에도 그와는 화풍이 아주 다른 베노초 고촐리가 있다. 그는 신, 구 화법을 절충해 그리기를 택했다.



이 프레스코화는 성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화려하고 세속적으로 느껴진다. 세 사람의 동방 박사가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이 꼭 왕자가 여행을 떠나는 장면처럼 보인다.

고촐리에게는 이 성경의 일화 그리기가 단지 아름다운 장신구와 화려한 의상, 환상의 동화 같은 세계를 그릴 수 있는 기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당시의 생활은 정말로 그림같이 화려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피렌체에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시의 축제 같은 생활의 멋과 취향이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이 작은 예배당을 찾아가는 기쁨을 누리게 될 테니 말이다.



안드레아 만테냐 (Andrea Mantegna : 1431-1506)


피렌체 남쪽과 북쪽의 도시에 사는 화가들도 도나텔로나 마사초의 새로운 미술의 의미를 받아들였다.

유명한 대학촌인 파도바(Padova)에서 작업하다가 그 후 만토바(Mantova)의 영주의 궁전에서 일했던 안드레아 만테냐가 있다. 파도바와 만토바는 모두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도시이다.

조토가 유명한 프레스코를 그렸던 예배당 근처에 있는 파도바의 한 교회에서 만테냐는 성 야고보의 전설을 설명하는 일련의 벽화들을 그렸다. 이 교회는 2차 대전중의 폭격으로 심한 피해를 입어 현재 만테냐의 벽화들은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다.

그중의 하나인 이 프레스코는 사형장으로 호송되는 성 야고보를 묘사하고 있다.


안드레아 만테냐,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성 야고보>, 1455년경. 프레스코, 파도바의 에레미타니 성당 벽화였으나 현재 소실

성 야고보가 끌려들어 온 성문은 로마의 개선문으로, 호송하는 군인들도 모두 고전 시대의 기념상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로마 군대의 복장에 동일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이 그림이 우리들에게 고대의 조각을 연상케 하는 것은 단지 이러한 의상과 장신구의 세부 처리뿐만이 아니다. 이 장면 전체에서 엄격함과 장대함을 가진 고대 로마 미술의 정신이 넘쳐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마사초(11장 참조)의 인물들처럼 조각적이고 인상적이다. 마사초처럼 원근법을 열심히 이용하여 개선문 뒤편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아득하게 여겨진다.

그는 마치 능숙한 연극 연출가가 무대의 동선을 짜듯 인물들을 배치함으로써 그 사건이 일어난 순간의 의미와 과정을 전달하려 했다. 전체적 배경과 인물 배치도 정면이 아니라 관객이 밑에서 무대 위 배우들을 올려다보듯 각도를 올려서 그렸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특이하고 인상적이다.


성 야고보를 호송하는 행렬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박해자들 중의 한 사람이 죄를 뉘우치고 성인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성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성인은 조용히 돌아서서 그 사람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고 로마 군인들은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중의 한 사람은 무감동하게, 다른 한 사람은 감동을 받았다는 듯한 제스처로 한 손을 들어 올리고 있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6-1510)


산드로 보티첼리는 15세기 후반의 피렌체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는 기독교의 전설이 아닌 고전 시대의 신화, 즉 <비너스의 탄생>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다.


고전기의 신화는 과거의 위대했던 로마의 영광을 되찾고자 열정적이었던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신화는 거룩한 성경이나 아름다운 동화 이상의 것이었던 것이다.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5년경.. 캔버스에 템페라, 172,5x278.5 cm, 피렌체 우피치


보티첼리에게 그의 별장을 장식할 이 그림을 주문한 후원자는 권세 있고 부유한 메디치가의 일원이었다.

보티첼리는 이 신화를 품위 있는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을 것이다.


그림에 묘사된 비너스는 조개껍질을 타고 바다에서 솟아나 장미꽃 세례를 받으며, 바람의 신들에 의해 해안으로 밀려온다. 비너스가 땅에 발을 내딛으려 하자 계절의 여신 또는 님프 중의 하나가 외투를 들고 그녀를 맞이한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너무나 아름답다.
그래서 그녀의 목이 부자연스럽게 길다거나 어깨가 가파르게 처져 있다거나 또는 왼쪽 팔이 다소 어색하게 몸에 붙어있다든가 하는 점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게 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즉 우아한 윤곽선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연에 구애받지 않은 보티첼리의 이러한 자유로운 표현은
하늘로부터 내려진 선물로서 우리 해변에 떠밀려온 무한히 부드럽고 섬세한 존재에 대한 인상을 한층 드높여주고 있기 때문에, 화면의 아름다움과 조화에 보탬이 되고 있다고.


보티첼리에게 이 그림을 주문했던 부유한 상인,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는 나중에 한 대륙의 이름이 될 운명을 가진 한 피렌체인의 고용주이기도 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 (Amerigo Vespucci)가 신대륙으로 항해를 떠난 것도 이 사람의 회사에서 일할 때였다.

아메리고 베스푸치!

America 대륙은 바로 그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렇게 르네상스를 이룩한 '피렌체 유파 미술가'들을 살펴보았다.

모든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1300년 경 위대한 미술가의 시대를 연 조토의 발견.

1400년 경 잃어버린 영광의 부흥시대를 연 브루넬레스키의 발견.

이어지는 여러 미술가들의 발견들...

이 변화와 발전의 행보는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났다 스르륵~ 사라지는 것들이 아니었다.


사람이 있는 곳에 미술이 있고
미술이 있는 곳에 미술가가, 감상자가, 후원자가...
그러니까 다시 사람이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하는 매개체가 된 미술!
그 미술을 배우며 미술가들을 알아가는 이 시간...
나도 저들처럼 발전하고 있다.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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