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전통과 혁신 2 - 15세기 북유럽
유럽 여행을 몇 번 다녀온 바 있다. 당시 별반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갔었지만 차이를 느끼는 부분이 있었다. 이태리와 그리스 그 밖의 다른 나라, 이렇게 세 개의 지역에 자리한 교회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번에 공부하면서 그 차이점을 분명하게 확인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면서 로마제국의 후예들과 나머지 다른 나라들의 국제화된 고딕 양식의 차이. 그 배경과 문화, 각 유파의 형성과 실험, 연구, 발전 등등...
이탈리아는 당시에도 여전히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다. 북유럽의 학자나 예술가들이 피렌체를 견학하는 것은 오늘날 미국 뉴욕을 탐방하는 것과 비슷한 동기였을 것이다. 최첨단의 기술과 유행 등을 보고 느끼고 새롭게 적용시켜 창조적 작품들을 만들어내고자 갈망했었을 것이다.
진짜 예술가라면 당대의 유명한 미술가들의 작품을 그대로 따라 답습하지 않는다. 장인의 자부심과 긍지도 있지만, 자기 나라에 맞추어 취사선택해 조금씩 다르게 표현해내려는 창작의 열정이 타오르기 때문이다.
북유럽의 미술가들이 그러했다. 이탈리아 브루넬리스키의 혁신을 그대로 따라 하지 않는 대신 기존의 고딕 양식을 살짝 틀어서 변화를 주었다.
14세기 말에 세워진 영국의 엑서터 성당(11장 참조)의 장식적 양식을 기억할 것이다. 15세기에 들어서서 이러한 복잡한 트레이서리와 환상적 양식이 더욱 나타나게 되었다.
프랑스 루앙의 이 법원 건축물은 플랑부아양(Flamboyant ; 타오르는 불꽃 모양) 양식'이라고도 불리는 프랑스 고딕 양식의 최후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이든 과하면 질리게 마련이다. 별 의미 없이 동화의 세계에서나 볼 법한 뾰족 뾰족 치솟은 첨탑의 모습은 환상이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영국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 예배당은 '수직 양식(Perpendicular style)'으로 알려져 있다.
이 역시 고딕 양식의 마지막 단계로서 그 이전 시대의 장식적인 트레이서리의 곡선과 아치보다 직선을 더 빈번하게 사용한 14세기 말과 15세기 초 영국 건축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인 말이다.
이 예배당의 내부는 기존 고딕 양식 교회보다 훨씬 단순하다. 신랑을 중심으로 좌, 우 측랑이 없기 때문에 기둥과 가파른 아치도 생략됐고, 따라서 천장이 높은 홀 같다. 탁 트인 내부가 무척 시원해 보여서 현대적인 느낌 마저 든다.
이탈리아의 프라 안젤리코와 베노초 고촐리가 마사초의 혁신들을 14세기 정신을 지키면서 구사하였던 것처럼 (13장 참조) 북유럽에서도 얀 반 에이크의 혁신을 보다 더 전통적인 주제에 활용한 미술가가 있었다.
15세기 중엽에 쾰른에서 작업을 했던 독일 화가 슈테판 로흐너(Stefan Lochner ; 1410?-1451)가 그러했다.
위 그림에서 보듯이 장미 나무 아래에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꽃을 뿌리거나 아기 예수에게 과일을 건네는 작은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성모를 그린 매력적인 작품은 마치 프라 안젤리코가 마사초의 새로운 발견들을 알고 있었듯이 이 거장 또한 반 에이크의 새로운 방법들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얀 반 에이크는 그림 전체가 꼼꼼한 관찰로 꽉 찰 때까지 조심스럽게 세부를 하나씩 첨가함으로써 그림을 자연의 거울로 만드는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그림은 그 정신으로 보면 반 에이크에 가깝다기보다는 오히려 고딕 양식의 <월튼 두폭화> (11장 참조)에 가깝게 여겨진다. 그의 그림 속의 인물들과 비교해보면 두폭화의 인물들은 다소 평면적으로 보인다. 로흐너의 성모도 여전히 황금색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그 앞에는 정감 있는 현실적인 무대가 펼쳐져 있다.
이 삽화는 당시 중세 도시의 광경을 생생하게 그린 그림이다. 당시의 의상, 매점과 상인들과 구경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경쾌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가운데에 한 손에 매를 든 남자의 모습은 지금도 유럽 도시에서 여전히 볼 수 있는 광경이라 흥미롭다.
프랑스의 선진적인 화가인 장 푸케(Jean Fouquet : 1420?-80?)를 주목한다. 그는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1447년 로마에 가서 교황을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지 몇 년 뒤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기증자의 초상이다. <월튼 두폭화>(책 도판 143)에서와 같이 성인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를 올리는 기증자를 보호하고 있다. 이 성인은 순교자 성 스테파누스(스데반)이다. 그가 들고 있는 책 위에는 큰 돌이 하나 얹혀져 있다. 이는 그가 돌로 쳐 죽임을 당했던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6-7장)
<월튼 두폭화>와 비교해보면 불과 반 세기 동안에 자연을 묘사하는 미술 표현이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지 알 수 있다.
<윌튼 두폭화>의 성인들과 기증자는 마치 종이에서 오려내어 그림에 붙인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장 푸케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은 마치 조각처럼 다듬어진 것같이 보인다. <윌튼 두폭화>에서는 명암을 찾아볼 수 없었다. 푸케는 피렌체 유파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했던 것처럼(책 도판 170) 빛을 사용해 명암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회화 방식은 푸케가 이탈리아의 작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림에 나타난 모피, 돌, 옷감, 대리석 등 사물의 질감과 표면의 세밀한 표현은 얀 반 에이크의 북유럽 전통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또한 보여준다.
로마를 방문한(1450년의 순례 여행)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북유럽의 화가는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Rogier van der Weyden : 1400-64)이었다. 이 거장에 관해서는 그가 얀 반 에이크가 작업했던 남네덜란드에서 큰 명성을 누리며 살았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다음은 십자가에서 예수를 내리는 장면을 그린 대형 제단화이다.
로지에르는 반 에이크와 같이 머리카락 하나하나, 바느질 솔기 하나하나 등 모든 세부를 충실하게 재현해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현실적인 장면을 묘사한 것은 아니다. 그는 중간 색조의 배경을 등진 좁은 무대 위에 인물들을 배치한다. 그는 대형 제단화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키는 방법을 연구했던 것 같다.
즉 멀리서도 보일 수 있도록 각 인물의 윤곽을 분명히 하고, 화면 구성도 정확히 배치시켜야 했다.
죽은 예수를 중심으로 혼절한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슬퍼하는 모습, 성 요한을 비롯한 남자들의 비장한 표정과 몸짓 등등 무대 위에서 실제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뚜렷한 인물의 대비와 구성으로 인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은혜가 신도들에게 더욱 강렬하게 전해졌을 것이다.
로지에르의 이러한 노력을 15세기 후반의 위대한 플랑드르의 화가 후고 반 데르 후스(Hugo van der Goes : 1482년 사망)의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당시의 북유럽 화가들 가운데 개인적인 일화들이 전해져 오는 몇 안 되는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인데, 만년에 자진해서 어떤 수도원에 은거하여 죄책감과 우울증에 사로잡혀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미술에는 얀 반 에이크의 평온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 긴장되고 진지한 것이 있다.
위 그림은 그의 작품〈성모의 임종>이다. 성모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는 12 사도들의 다양한 반응을 묘사한 그의 훌륭한 솜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조용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 격렬하게 슬퍼하는 자와 경솔하게 하품을 하는 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정들을 아주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반 데르 후스가 성도들의 눈 앞에 현실의 장면을 떠올려 주기 위해, 그러면서도 화면의 어떤 부분도 낭비하거나 무의미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느낄 수 있다.
전면의 두 사도와 침상 위의 그리스도의 환영을 보아도 이 화가가 화면의 공간을 최대한 유효하게 사용함으로써 인물들을 전 화면에 배치하여 저들 앞에 펼쳐 보이려 얼마나 애썼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다음은 폴란드의 크라쿠프 시를 위해서 주문된 목각 제단이다.
이 제단을 만든 거장은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1533년에 고령으로 그곳에서 죽은 바이트 슈토스(Veit Stoss)이다.
중앙의 제단은 12 사도들에 둘러싸인 성모의 임종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그림에서는 성모가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그려져 있다. 바로 그 위에는 그녀의 영혼이 예수에 의해 천당으로 인도되는 장면이 있고 또 맨 꼭대기에는 아버지 하느님과 그의 아들이 성모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있는 장면이 계속되고 있다. 제단의 양 옆 날개에는 왕관을 씌우는 장면과 함께 소위 마리아의 일곱 가지 기쁨이라고 알려져 있는 성모의 생애 중 중요한 순간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 일련의 이야기는 수태 고지를 표현한 왼쪽 상단의 사각형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내려오면서 예수의 탄생과 동방 박사들 의 경배로 이어진다. 오른쪽 날개에서 우리는 많은 슬픔 끝에 남은 세 가지 즐거운 일들, 즉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절에 성령이 쏟아져 내리는 장면을 본다.
성모 축일에 성당에 모인 신자들은 이렇게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이 세세히 새겨져 있는 부조물 제단화를 통해 깊이 묵상하고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사도들의 머리와 손 등을 놀랍도록 세심하게 처리한 바이트 슈토스의 진정성 넘치는 표현을 보라!
정말 놀랍지 않은가!
당시 이러한 세밀한 작업을 위해 인내하며 제작했을 미술가의 수고를 상상하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15세기 중엽에 독일에서는 미래의 미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미술뿐 만 아니라 인쇄술의 발명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대단히 중요한 미술 기법이 발명되었다. 바로 목판화술(woodcut)이다.
이로써 그림을 인쇄하는 것이 책을 인쇄하는 것보다 수십 년 앞서게 되었으며, 성인들의 성상(聖像)과 기도문이 들어 있는 작은 책자들이 인쇄되어 순례자들과 신도들에게 배포되었다.
그러나 목판화는 그림을 인쇄하기에 조잡한 방법임이 곧 증명되었다.
그래서 보다 더 정교한 효과를 내게 해주는 다른 매체로 목판 대신 동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뷰린이라는 특수한 동판용 조각칼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잉크를 발라 찍어냈다.
이 그림에서 보듯 동판화에서 훨씬 풍부한 세부 묘사와 미묘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목판술과 동판술은 순식간에 전 유럽에 전파되었다. 이탈리아에는 만테냐와 보티첼리 파의 동판화가 제작되었고 네덜란드와 프랑스에는 다른 유파의 동판화들이 제작되었다.
판화는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서로 다른 유파들의 미술 개념을 배울 수 있게 해 준 새로운 수단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다른 미술가로부터 아이디어와 구성을 베껴오는 것을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많은 미술 대가 집단들은 동판화를 그들의 아이디어와 구성을 빌려오는 견본책으로 이용했다.
인쇄술의 발명이 사상의 교환을 재촉하여 종교 개혁이 일어났듯이
그림의 인쇄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탐구하고 따라가도록 하는 촉매제가 되어 주었다.
이로써 북유럽도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서서히 중세 미술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