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샘 Mar 29. 2020

그럼에도 용기 내어 나아가는 모습을 봐주길

쪼그라든 마음 펴기

너무도 쉽게 부정적인 감정, 생각부터 올리는 내가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못된 사람인데 마냥 못되게 굴지 못하는 나를 못난 사람 취급하기도 했다. 그러다 막상 누군가에게 못난이 취급받았다 생각이 들 때면 숨어버리거나 상대를 할퀴려 들었다. 이런 나를 알아차릴 때마다 내가 너무 싫어 생각조차 놓아버리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 '마음을 없앨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성숙하고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 못나고 못된 내가 그리 반짝이는 세계에 절대 들어갈 수 없을 거라고. 혹은 내가 발을 들이밀어도 그 빛은 퇴색하지 않겠지만 내가 빛나게 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이런 내가 떳떳하지 못했고, 부끄러웠다. 


처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으면서는 이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주변에 저렇게 좋은 사람들만 있었으니 그렇게 이쁜 생각 하면서 빛나는 삶을 살았겠지.

나는 그런 행운을 가지지는 못했다네.


명상록의 1권에는 아우렐리우스가 주변인들에게서 배운 훌륭한 삶의 자세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게 삐딱하게 보였던 것이다. 질투가 나기도 했고, 내 처지가 딱하다는 생각에 울분을 토하고 싶기도 했다.


학창 시절에는 너무도 밝아 친구들을 주변으로 끌어들이는 아이가 너무 부러웠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와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지금보다 더 작아져버릴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저 아이는 무슨 복을 타고나서 저렇게 반짝일까.

쟤는 어쩜 저리 자신감이 넘칠까.


왜 나는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온갖 생각, 주로 두려움과 나의 불행에 관한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부정적인 생각만 하도록 설계되어 난 것처럼.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람과 나 사이에는 너무나 간극이 있어 아무리 손을 뻗어도 손가락 끝도 닿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지식을 쌓으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기대해보기도 했다. 아는 게 많아지면 동경했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그리 빛날 수 있는지, 당당할 수 있는지, 용기 낼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면.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배우면 한 발 정돈 걸치고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도 아니면 흉내 정돈 내며 살 있진 않을까?


하지만 안다는 것은 기대만큼 내게  도움을 주지 못했다. 무엇인지 알게 되어도 그걸 실천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였다. 안다고 다 그렇게 살아지는 건 아니었다. 앎은 힘이라던데. 자존감이 무너져 있고, 쉽게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곤 하는 사람에게 앎은 가끔 독이 되었다. 아는 만큼 행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이 더 나를 쪼그라들게 만들기도 했으니. 그런 이유로 차라리 모르는 편이 더 낫겠다 싶은 생각도 더러 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어른(어른다운 어른)이 되기를 주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엄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해진 지금, 그래서 나는 매 순간 노력하고 있다. 사실 이전에는 워낙 위축된 나의 상태에 익숙해져 그 상태를 견디는 게 면역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위축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되어서일까. 당당해지기로 결심한 지금은 순간 위축된 나를 마주하는 게 이전보다 훨씬 더 괴롭다. 결국 이것도 극복해야 할 나의 몫이겠지.


어른이 된다는 건 스스로를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무를 지니게 됨을 의미한다.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 '책임'의 막중함은 더욱 가중된다. 이것이 무겁고 힘든 일이기만 하다면 삶은 고달파지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생각을 조금 달리해본다. 나를 책임지기 위해 경험하는 일련의 괴로움들이 성장의 원동력이 되고, 이렇게 성장하며 내 삶의 의미도 더해진다고. 그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활력과 감동을 더 자주 만나게 될 거라고 말이다.


부모가 되면서 책임이 더욱 막중해지는 건 내 삶을 어떻게 꾸려가는지 아이가 지켜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이 아이에게 어떤 삶의 태도를 보여줄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껏 쪼그라든 태도로 사는 삶을 보여줄 것인가, 그럼에도 당당해질 용기를 내어보는 삶을 보여줄 것인가.


나는 후자의 태도를 보여주고파 배우고, 스스로를 훈련하기 시작했다. 쉽게 만족할 수 있는, 편하기만 한 일상으로는 용기를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조금 괴롭더라도 나를 단련시키려 노력한다.


결핍이 있더라도, 극복하기 어려운 콤플렉스로 위축되더라도 결국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삶. 그렇게 나는 나를 성장시키기로 했다.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더욱 당당해지기를 바라며 용기를 내어보기로 말이다.


덕에 오늘도 쪼그라든 마음을 여럿 펴내었다.  위축되어도 나는 이렇게 쪼그라든 마음을 펴낼 것이다.


출처: 글그램







이전 07화 나는 왜 행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