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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샘 Mar 16. 2020

아이를 보는데 문득 눈물이 나오더라

출처: 글그램

잠든 아이의 얼굴이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이토록 나를 감동시키는 존재가 있을 수 있다니.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 해도 이럴 줄은 몰랐다. 모든 게 작디작고 연약한 아이. 평생 아껴주고 사랑해주리라 다짐했다. 사랑을 듬뿍 주는, 든든한 조력자와 같은 엄마가 되겠다고 되뇌고 또 되뇌었다.


손가락, 발가락 움직이는 것마저 기특해서 웃음이 나왔다. 너무나도 사랑한다고. 매번 속삭여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의 이 마음에 꼬옥 들어맞는 표현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저 사랑한다고. 항상 곁에서, 뒤에서 있어주마 속삭일 뿐이었다. 아이가 깨어난 아침부터 잠드는 밤까지 나의 고백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었다.


언젠가 곤히 낮잠에 빠져든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도 예쁠까.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가 맞을까? 귀하고 귀하다.

이런 생각들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주체되지 않는 감정이 흘러나왔다.  덕에 나는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게 되었고, 그동안 내 머릿속엔 한 가지 질문만이 부유했다.


엄마도 내가 아기였을 때 이렇게  예뻐해 줬을까?


그러고 보니 엄마에게서 내 아기 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별로 없다. "나 애기였을 때 어땠어?" 물으면 "순했어." 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나오는 항상 똑같은 이야기. 엄마가 얼마나 불행했는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만 잔뜩 듣다 나까지 기분이 상해버리고 말았던 기억뿐이다. 자라는 내내 사랑한단 말 한마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제와 서야 사랑스러웠다 말해주겠는가 생각했다.


한 번 터져 나온 슬픔은 두 번, 세 번 연이어 터져 나왔다. 살짝 우울증을 겪고 있는 건가 싶었다. 잘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당황스러웠다. 꾹 눌러볼까 하다 그동안 감춰두었던 감정들이 나를 얼마나 상하게 만들었는지 몸소 겪었던 터라 그냥 쏟아내고 말았다. 울고 싶으면 울었고, 억지로 기분을 좋게 하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눈물을 줄줄 흘려보냈다. 보내고 보내다 보면 조금은 무뎌지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멀리 떨어져 계신 엄마를 위해 하루에 영상통화를 두 번씩 했다. 아침저녁으로. 이제 막 태어난 손주 보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계실지 알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내 아이를 이렇게 예뻐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아이를 가졌음을 처음 알렸을 때도, 그리고 임신 기간 내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던 엄마였다. 이렇게 예뻐하실 줄은 사실 짐작도 하지 못했다. 본인도 그런 자신의 마음이 낯설었는지 종종 이런 말을 건네시곤 했다.


내가 이럴 줄은 몰랐는데. 손주가 더 예쁘다더니 그 말이 맞아 


그렇게 잠을 쪼개가며 잘 때에도 하루 영상통화 두 번은 잊지 않고 했다. 우리 아이 예뻐하시는 모습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매일 보면서 슬픈 생각이 들었던 건 아마도 내 어릴 적 모습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엔 왜 이런 감정이 올라오는지도 명확히 알아챌 수 없었다. 통화를 마치고 나면 씁쓸하게 웃곤 했는데 그 이유를 정확히 알게 된 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아이를 갖고 난 후부터 치열하게 읽고 쓰고 하면서도 일부분은 외면하고자 했던 것들이 계속 떠올랐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렇게 슬픔이 올라오는데도 나는 왜 그리 집착하듯 연락을 취했던 걸까?


나는 엄마가 내 아이에게 보이는 관심과 사랑이 나에게로 전해지는 듯한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미워했으면서도 사실은 이토록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을 바라는 어린 내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슬프면서도 한편으론 안심되기도 했다. 남의 손주 이쁜 건 모르겠는데 내 자식 아이는 예쁘더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내' 아이라서 예쁘다는 말이 진심일까 의문을 갖기도 했지만. 그래도 런 말을 듣는데 안심이 되었고 기쁘기도 했다. 복잡한 감정이었다.




지금은 의무적으로 연락을 하진 않고 있다.  대신 나는 부모님의 행복을 책임지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고, 사랑에 대한 정의를 스스로 다시 내리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과거의 기억을 확대하거나 축소하거나 회피하거나 얽매이거나 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건 정말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더 소중히 아껴야 할 현재의 내 모습에 더욱 의미를 부여하고 집중하며 살고 싶기에. 오늘도 나는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아이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진 않는다. 기쁜 마음으로 아이를 본다. 


어제도 아이에게 많이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주었고, 많이 안아주었다.

엄마와 자식. 가장 가까운 관계인만큼 가장 상처를 주고받는 사이가 될 수도 있음을 알기에, 내 아이는 사랑의 결핍을 최소한 엄마에게서 느끼며 살지 않기를 바라기에 나는 오늘도 결심한다. 사랑의 표현을 아끼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오늘도 나는 나를 단련할 것이다.

그로써 마음이 더 단단해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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