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완벽주의자였던 나는 시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스스로도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고, 잘한 일은 칭찬할 줄 모르던 터라 익숙한 일이 아니면 시작부터 지레 겁을 먹곤 했다. 힘은 들어가고 누가 봐도 불편할 정도로 긴장을 하니 결과는 늘 나에게 기준 미달이었다. 더불어 다른 사람의 눈에도 기준 미달일 거라 짐작하며 자책하곤 했다.
스스로에게 너무 관대해서도 안되지만 역시 너무 엄격해서도 안된다. 칭찬할 줄 모른다는 건 자기 신뢰를 잃기 쉽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매번 결과가 불만족스러우니 시간과 마음을 들여 일을 해도 기쁘지 않았고 다음번엔 더 긴장이 되곤 했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번 마음에 차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 결국 도망쳐 버리기도 했다. 그 또한 유쾌한 일은 아니어서 이러나저러나 괴롭긴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아예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생각을 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아주 모른 척할 수 있게 생각이 들어올 틈도 없도록 노력했다. 그 탓에 나는 세상과 유리되어 살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마저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보기 싫어 고개를 숙일만큼 피해왔다. 그런데도 그 외면이 내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을 깨달은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래도 내 삶은 내가 책임져야 함을 깨닫고 난 후로는 어쨌든 해보기로 마음먹을 수 있게 되었다. 다행히도.
지나고 보니 일의 결과보단 내가 싫었던 것이었다. 내가 싫으니 내가 하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그래서 완벽한 인간이 될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고 싶은 내 마음도 다독여 가며. 시작에 앞서 두려움을 느낄 때나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일과 나를 분리시키는 말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의 결과물이 곧 나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라는 걸.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두려움과 불안을 인식할 때마다 나 자신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를.
스펜서 존슨의 <멘토>에는 '1분 칭찬하기'라는 효과적으로 자신을 칭찬하고 자부심을 불어넣는 방법이 제시된다. 단 1분이 필요했을 뿐인데 그동안 나는 자신에 대한 칭찬에 인색했구나 싶었다. 앞으로는 칭찬을 마구 마구 해주리라.
나는 이전보다 꽤 목표지향적인 사람이 되었고, 자기반성은 좀 그만해도 된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반성이라기보다 비난에 가깝나?).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종종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도 부족하다 느꼈던 건 내가 날 칭찬할 줄 몰랐기 때문에, 스스로 만족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라는 책임이 하나 더 늘어난 뒤로 완벽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특히 나보다 내 아이 돌보는 일에 더 집중하게 되는 엄마일수록.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목표가 온갖 예상치 못한 변수를 완벽히 다루고 아무 문제없이 키워야 함을 말하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 늘 기대와 결과가 같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씩 배워간다는 생각과 자신을 가져야 함을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아이를 잘 키우는 일은 나를 잘 키우는 일이다. 나도 아이와 성장하는 입장이니 꼭 완벽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면 분명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좋을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어떻게 매번 잘할 수만 있을까?
육아엔 자신감이 필수이다. 그러니 칭찬을 마구 마구 해주자. 강한 책임감을 느끼는 만큼 잘한 일보다 잘 못한 일에 더 집중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말자 다시 다짐해본다.
난 오늘 아이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주었고, 안아달라는 요구에 안아주었다. 울면 눈물을 닦아 주었고, 손이 더러워지면 손도 씻겨 주었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아이 돌보는 일이 쉬울 리는 없다. 많은 사람이 하고, 누구나 한다고 편하고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애썼다면 애쓴 나를 격려해주자. 그래야 성찰도 하고 목표도 세울 수 있는 법.
매번 잘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러니 작은 일에도 칭찬할 줄 아는 내가 되길. 그래서 내 아이, 내 학생들에게 작은 일에도 칭찬해줄 수 있게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