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 Sep 24. 2023

분실물센터에서

- 저, 안녕하세요. 제가 뭘 좀 잃어버렸는데요.

- 네, 우선 여기에 인적 사항을 적어 주시겠어요? 분실물이 있어 불편하셨겠어요.

- 뭐 많이 불편했던 건 아니지만, 혹시 찾을 수 있다면 찾아볼까 싶어서요.

- (인적사항을 읽으며) 네, 가영님. 괜찮으시다면 잃어버린 것과 잃어버릴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실수 있을까요? 그러면 찾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 그러니까 제가 잃어버린 건... (주변을 둘러보다 작은 목소리로) 저의 성욕이에요. 잃어버린 지는 꽤 된 거 같은데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어요. 

- 아, 네... 가영님과 비슷한 나이대 분들이 잃어버린지도 모르고 계시다가 한참 후에 알아채는 경우가 종종 있으시더라고요. 알아챈다고 하더라도 가영님처럼 이렇게 찾겠다고 오시는 경우는 거의 드물어요. 아, 그렇다고 가영님이 이상하다고 드리는 말씀은 아니고요.

- 저도 사실 고민을 좀 했어요. 이제 와 찾는다고 해서 딱히 쓸모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찾겠다고 이렇게 나대는 게 주변 사람들이나 가족들 보기에 좀 민망하기도 하고.  

- 그런가요? 잃어버린 걸 찾겠다는데 민망해할 이유가 있을까요?

- 그러게요, 나도 왜 그래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건 ‘성욕’이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

한 때부터 그랬던 거 같아요. 있어도 없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 성인이 되어 한창 성욕이 와구와구 올라오던 때도 최대한 나는 아닌 척, 그래야 하는 줄 알았어요. 물론 몰래몰래 할 건 다 했지만요. 

- 이야기가 나왔으니, 잃어버린 성욕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세요. 

- 음, 그러니까... 제 성욕은 10대 후반쯤 확연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던 거 같아요. 그땐 뭣도 모르면서(몰라서 더 그랬는지) 엄청 작은 자극에도 쉽게 근질근질 간질간질했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20대, 결혼하기 전까지 전성기를 누렸죠. 그때 한창 맛(?)을 알아가면서 자신도 감당이 힘들었던 거 같아. 누구라도 만나고 싶고, 스킨십하고 싶고, 더 가까워지면 자고 싶고. 요즘이야 필요하면 핸드폰 앱으로 사람을 만나 쉽게 연애도 하고 또 대놓고 원나잇도 하던데, 나 20대 때에는 그런 게 없었어. 하기야 뭐 나는 그런 거 하나 없어도 손가락 발가락 다 꼽아야 할 정도로 쉼 없이 연애했지만... 왜 웃어요? 내 말이 안 믿겨요?

- 아유, 그럴 리가요. 갑자기 표정이 너무 밝아지셔서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합니다.

- 내가 그랬나요? 괜찮아요. 그건 그렇고, 아, 내가 어디까지 말했죠? 아, 손가락이랑 발가락. 맞아! 손가락으로는 모자라지. 그렇게 정신없이 연애하다 한순간 훅 결혼했어요. 남편한테 첫눈에 반해가지고. 그때 우리 남편 참 괜찮았는데...

- 지금은 안 괜찮으시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 어? 네? 제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에이, 젊을 때잖아요. 남편도 나도. 그땐 다들 뭘 안 해도 그 자체로 예쁘잖아요. 그렇게, 다들. 그땐 몰랐지만.

- 그렇긴 하죠. 지금 자녀분 나이랑 몇 살 차이 안 날 때였겠어요.

- 그래요, 그래서 요즘 부쩍 더 그때 생각이 나는가 봐요. 이맘때 나는 어땠나, 맞아, 그랬지... 그랬었지, 이러면서. 에너지 가득한 아이들을 보면 그 자체로 빛이 나는 거 같아요. 사랑스럽죠. 내가 아이들 나이었을 때, 어른들이 늘 하시던 말이 “뭐 안 해도 예쁘다. 충분히 예쁘다.” 했는데, 그냥 하시는 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정말 그래요. 젊음은, 그냥 예뻐요. 그들을 보면 없던 사랑도 퐁퐁 샘솟는 거 같아. 뭐, 그렇기는 한데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거나 하지는 않아요. ‘10년만, 20년만 젊었어도...’ 이런 생각도 난 잘 안 해. 내가 뭐 엄청나게 잘 살아왔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너무 서툴렀고, 그러면서도 자만했고, 때문에 실수도 잦았고, 그로 인해 오랜 시간 힘들기도 했지만, 그것들을 잘 지나와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그 또한 나름대로 내게는 필요한 거였다고 생각해요. 그래요, 난 그냥 지금 내가 좋은 거 같아. 이 나이가 되어서야 보이는 것들, 느낄 수 있는 것들... 그게 참 소중해. 걔들은 알 수 없는 것들.

- 지금도 예쁘세요, 충분히.

- 아, 그러네요, 정말. 말을 하다 보니 알겠어요. 나, 충분한 거 같아요. (웃음) 나이가 들면서 하나둘 잃어버리는 것이 생기는 대신 집중해야 할 것들은 또렷해지는 거 같아요. 그건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성욕 같은 욕망일 수도 있고, 이루고 싶은 오래된 목표일 수도 있겠죠. 나의 경우 또렷해지는 게 바로 ‘나’에요. 나의 몸, 나의 이야기, 나의 사랑, 나의 시간 그리고 나의 사람... 이렇게 공들여 나에게 집중하는 시기가 있었나 싶어요. 아마도 처음인거 같아. 순간 순간 만나지는 ‘나’를 글로 엮어 가고 있어요. 그럴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바람이 점점 시원해지네요. 이제 가을이 오겠죠. 쨍하니 초록이던 잎들이 하나둘 고은 색이 되어 떨어질거고... 떨어지는 모습도, 떨어진 후에도, 아름다울거에요, 충분히! 


저, 죄송한데요, 분실물 신고 취소해 주시겠어요?    


이전 11화 이건 나 말고 내가 아는 사람 얘긴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