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안녕하세요. 제가 뭘 좀 잃어버렸는데요.
- 네, 우선 여기에 인적 사항을 적어 주시겠어요? 분실물이 있어 불편하셨겠어요.
- 뭐 많이 불편했던 건 아니지만, 혹시 찾을 수 있다면 찾아볼까 싶어서요.
- (인적사항을 읽으며) 네, 가영님. 괜찮으시다면 잃어버린 것과 잃어버릴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실수 있을까요? 그러면 찾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 그러니까 제가 잃어버린 건... (주변을 둘러보다 작은 목소리로) 저의 성욕이에요. 잃어버린 지는 꽤 된 거 같은데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어요.
- 아, 네... 가영님과 비슷한 나이대 분들이 잃어버린지도 모르고 계시다가 한참 후에 알아채는 경우가 종종 있으시더라고요. 알아챈다고 하더라도 가영님처럼 이렇게 찾겠다고 오시는 경우는 거의 드물어요. 아, 그렇다고 가영님이 이상하다고 드리는 말씀은 아니고요.
- 저도 사실 고민을 좀 했어요. 이제 와 찾는다고 해서 딱히 쓸모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찾겠다고 이렇게 나대는 게 주변 사람들이나 가족들 보기에 좀 민망하기도 하고.
- 그런가요? 잃어버린 걸 찾겠다는데 민망해할 이유가 있을까요?
- 그러게요, 나도 왜 그래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건 ‘성욕’이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
한 때부터 그랬던 거 같아요. 있어도 없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 성인이 되어 한창 성욕이 와구와구 올라오던 때도 최대한 나는 아닌 척, 그래야 하는 줄 알았어요. 물론 몰래몰래 할 건 다 했지만요.
- 이야기가 나왔으니, 잃어버린 성욕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세요.
- 음, 그러니까... 제 성욕은 10대 후반쯤 확연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던 거 같아요. 그땐 뭣도 모르면서(몰라서 더 그랬는지) 엄청 작은 자극에도 쉽게 근질근질 간질간질했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20대, 결혼하기 전까지 전성기를 누렸죠. 그때 한창 맛(?)을 알아가면서 자신도 감당이 힘들었던 거 같아. 누구라도 만나고 싶고, 스킨십하고 싶고, 더 가까워지면 자고 싶고. 요즘이야 필요하면 핸드폰 앱으로 사람을 만나 쉽게 연애도 하고 또 대놓고 원나잇도 하던데, 나 20대 때에는 그런 게 없었어. 하기야 뭐 나는 그런 거 하나 없어도 손가락 발가락 다 꼽아야 할 정도로 쉼 없이 연애했지만... 왜 웃어요? 내 말이 안 믿겨요?
- 아유, 그럴 리가요. 갑자기 표정이 너무 밝아지셔서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합니다.
- 내가 그랬나요? 괜찮아요. 그건 그렇고, 아, 내가 어디까지 말했죠? 아, 손가락이랑 발가락. 맞아! 손가락으로는 모자라지. 그렇게 정신없이 연애하다 한순간 훅 결혼했어요. 남편한테 첫눈에 반해가지고. 그때 우리 남편 참 괜찮았는데...
- 지금은 안 괜찮으시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 어? 네? 제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에이, 젊을 때잖아요. 남편도 나도. 그땐 다들 뭘 안 해도 그 자체로 예쁘잖아요. 그렇게, 다들. 그땐 몰랐지만.
- 그렇긴 하죠. 지금 자녀분 나이랑 몇 살 차이 안 날 때였겠어요.
- 그래요, 그래서 요즘 부쩍 더 그때 생각이 나는가 봐요. 이맘때 나는 어땠나, 맞아, 그랬지... 그랬었지, 이러면서. 에너지 가득한 아이들을 보면 그 자체로 빛이 나는 거 같아요. 사랑스럽죠. 내가 아이들 나이었을 때, 어른들이 늘 하시던 말이 “뭐 안 해도 예쁘다. 충분히 예쁘다.” 했는데, 그냥 하시는 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정말 그래요. 젊음은, 그냥 예뻐요. 그들을 보면 없던 사랑도 퐁퐁 샘솟는 거 같아. 뭐, 그렇기는 한데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거나 하지는 않아요. ‘10년만, 20년만 젊었어도...’ 이런 생각도 난 잘 안 해. 내가 뭐 엄청나게 잘 살아왔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너무 서툴렀고, 그러면서도 자만했고, 때문에 실수도 잦았고, 그로 인해 오랜 시간 힘들기도 했지만, 그것들을 잘 지나와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그 또한 나름대로 내게는 필요한 거였다고 생각해요. 그래요, 난 그냥 지금 내가 좋은 거 같아. 이 나이가 되어서야 보이는 것들, 느낄 수 있는 것들... 그게 참 소중해. 걔들은 알 수 없는 것들.
- 지금도 예쁘세요, 충분히.
- 아, 그러네요, 정말. 말을 하다 보니 알겠어요. 나, 충분한 거 같아요. (웃음) 나이가 들면서 하나둘 잃어버리는 것이 생기는 대신 집중해야 할 것들은 또렷해지는 거 같아요. 그건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성욕 같은 욕망일 수도 있고, 이루고 싶은 오래된 목표일 수도 있겠죠. 나의 경우 또렷해지는 게 바로 ‘나’에요. 나의 몸, 나의 이야기, 나의 사랑, 나의 시간 그리고 나의 사람... 이렇게 공들여 나에게 집중하는 시기가 있었나 싶어요. 아마도 처음인거 같아. 순간 순간 만나지는 ‘나’를 글로 엮어 가고 있어요. 그럴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바람이 점점 시원해지네요. 이제 가을이 오겠죠. 쨍하니 초록이던 잎들이 하나둘 고은 색이 되어 떨어질거고... 떨어지는 모습도, 떨어진 후에도, 아름다울거에요, 충분히!
저, 죄송한데요, 분실물 신고 취소해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