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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Oct 22. 2023

주제파악 능력시험

 *다음을 읽고 주제를 파악하시오. (서술형, 난이도 상)     

1. 

 석 달 만에 생리가 나온다. 며칠 전 달력을 보다가 최근 얼마간 생리를 하지 않았구나. 알았다. 이대로 완전히 끊길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래도 이상할 나이는 아니니까. 그래 뭐, 안 그래도 귀찮기만 하지. 잘됐네, 잘됐어. 요즘 돈도 못 버는 데 생리대값도 안 들어가고 시기가 아주 딱이네. 시원~하다! 내 삶에서 이미 지워진 듯 보이는 생리를 굳이 꺼내어 이러쿵저러쿵 북도 치고 장구도 치며 생리가 없어져 좋을 이유를 얹었다. 그러고는 다시 지워버렸다. 그건 내가 생리로부터 일방적으로 차인 것이 아닌 내 쪽에서도 그럴 이유가 충분하여 차버린 것임을 밝히는 의례였다. 그랬는데,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생리가 다시 나온다. 밑으로 묵직하게 잡아당기는 뻐근한 허리통증. 익숙하다. 혹시? 했지만 속지 말자 했다. 지난달이랑 지지난달에도 그 통증에 속아 며칠 동안은 긴장하며 생리대를 챙겨 다녔다. 갑작스럽게 축축한 느낌이 나면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가 확인하기도 했다. 역시나 아니었다. 끝났구나, ‘치사한 자식. 올 때도 자기 맘대로 더니 갈 때도 자기 맘대로네,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에라이, (보기와 달리) 냉정한 놈(년?) 같으니라고!’ 했다. 출산 계획도 가능성도 없는 현재의 나에게 별다른 도움도 되지 않고 민폐만 끼치는, 고작 정기적으로 ‘너는 빼도 박도 못하게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던 생리를 그렇게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다. 화장실에서 피를 본 첫 느낌은 아이러니하게도 반가움이었다. 아, 아직은 아니구나. 나는 아직, 여전히, 생물학적 빼박 여성이구나... 복잡하게 얽히는 감정 속 묘한 안도감. 반가움이라니, 안도감이라니! 그까짓 생리가 뭐라고. 쿨하게 보내준다고 할 때는 언제고. 아이 자존심 상해라.          


2. 

 8월 초, 급 퇴사했다. 얼굴 가운데로 집중되는 원인불명의 피부염이 점점 심해져 더 이상 근무를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 10월 중순이니, 두 달째 월급이 들어오지 않는다. 이번 달에도 안 들어올 예정이다. 근무 기간이 1년도 되지 않아 퇴직금 같은 게 있을 리 없고, 그나마 퇴사 바로 전 받은 월급이 얼마간 근근이 버텨낼 마중물이 돼야 하는데, 그 돈에다 남아 있던 잔액까지 보태어 몽땅 피부과에 바쳤다. ‘기꺼이 탈탈 털어 다 드리겠습니다. 그럼요, 현금이 편하시겠죠. 네네, 여기 있습니다. 아프기 전 상태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내 얼굴을 마주한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안 그런 척 애매하게 나를 피해는 일이 없게. 상대를 불편하게 했다는 미안함, 그 뒤에 더 크게 따라붙는 억울함, 수치심, 분노... 그런 마음으로 더 이상 힘들지 않게. 자꾸만 아래로 더 아래로, 어둠으로 더 어둠으로 향하는 낯선 내 시선에 대해, 원래부터 나는 좀 그런 사람이었다고 나조차 합리화해 버리기 전에, 나를 도와주세요. 제발.’ 친절한 간호사님이 앞으로 치료 일정을 잘 따라오면 분명히 좋아질 거라고 말했다. 하마터면 울퉁불퉁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로 그녀에게 뽀뽀라도 할 뻔했다. 그전에 그녀가 피했겠지만.

 퇴근한 남편에게 병원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치료비를 묻기에 결제금액에서 45만 원 줄여 말했다. 병원은 내게 45원 조차 싸게 해주지 않았지만, 남편에게 가해질 타격감이 신경 쓰여 그렇게 말해 버렸다. 줄여 말한 금액에도 남편의 얼굴은 굳었다. “나을 수만 있다면 돈이 얼마나 들든 해야지. 얼굴이 그게 뭐야...” 분명 위로인데 내게만 느껴지는 묘한 불편함. 표시 내지 않았다. 마지막 달 월급 받은 걸로 어찌저찌 결제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덕분에 난 생활비가 바닥난 상태이고 당신이 다음 달부터 일정 금액만큼 지원하지 않으면 결국 난 굶어 죽... 지는 않겠지만, 반강제적인 방식으로 박정미 작가가 말하는 ‘0원으로 사는 삶’에 도전! 하게 될 거라고...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저 필요하다 생각되는 최소 금액을 요청했다. 그는 별말 없이 두 달째 내게 돈을 입금 중이다. 이번 달에도 같은 금액이 들어올 예정이다. 감사하다고 맺음을 하면 깔끔하겠지만, 마음이 많이 시끄럽다. 늘 평범 속에서 반복해 오던 그를 향한 나의 돌봄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받는 돈으로 통처치나 싶기도 하고, 돈을 입금하는 그의 기꺼운 마음 곁 슬며시 곁들여질지 모르는 ‘언제까지?’라는 질문이 신경 쓰이기도 한다. 나도 그 ‘언제까지’가 궁금하고 결국 답을 해 줄 수 없어서. 그 감정이 비록 나의 자격지심일지라도, 아픈 이의 자격지심은 그 자체로 온전하고 세심한 돌봄이 필요하다는 걸 아파 보니 안다.   

   

주제파악:

  앤 보이어의 <언다잉>을 읽으며 내내 전율이 일었다. 할 수 있다면 책을 통째로 삼켜서 오래오래 소화시키며 하나도 빠짐없이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담담하면서도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문장들, 통찰력에 무릎을 치게 되면서도 그걸 딱 들어맞는 기막힌 은유나 역설적인 유머러스함으로 표현하는 센스, 작가가 느끼는 고통의 색, 냄새, 맛, 소리까지 모두 너무나 구체적으로 느껴져 울 것 같은 마음이 되면서도 고통을 다룬 그 문단 자체가 통으로 아름답고 특별해서 그녀의 까마득한 고통에 겁도 없이 더 다가가게 되었다. 그야말로 중독적. 그런데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따로 있다. 이전에 최현숙 작가의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를 읽고 나서 비슷한 감정으로 내내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있다. 둘은 (생물학적) 여성이고, 거기에 한 가지 더 치명적인 취약성을 가진다. 앤 보이어는 아픈 사람으로, 최현숙은 늙은 사람으로. 책 속에서 그녀들은 그런 취약성에 대해서 자신이 얼마나 주제파악을 잘하는 사람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절대로 취약함이라는 주제 속에 매몰되어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그런 취약성으로 내몬 세상에 대해 따박따박 조목조목 비틀고 살살 끄집어내 (굳이 화내는 높은 톤이 아닌 우아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되묻는다. ‘저기, 이건 좀 엿같지 않겠니? 응, 엿. 맞아, 뭔지 알지? 나 이러면 좀 빡치는데 말이지. 호호.’ 뭐 이런 식이다. 믓찌다, 믓찌다, 우리 언니들!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녀들의 주제파악 능력이 너무나 부럽다. 어느 만큼이나 ‘삶을 똑바로 마주’해야 살아있는 동안 스스로를 절대 ‘언다잉’ 주체로 안을 수 있나. 나도 쓰고 쓰고 쓰다 보면 언젠가는 그게 가능해질까? 궁금했다. 그래서 쓰게 됐다. 이건, 나의 (싹수를 확인하는) 주제파악 능력시험. 채점자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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