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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May 15. 2020

자연의 품에서

오랜만에 장에 가 봐요!


"시장 가자구나."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다리를 치켜세우고 까닥거리며 만화책을 보고 있으면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와 말씀하신다. 

나는 그 소리에 다른 생각 할 겨를도 없이 만화책을 팽개치고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어머니는 늘 시장을 가실 때 나를 데리고 다녔다. 

나는 시장가자는 소리를 제일 좋아했다. 동화책이나 만화책이 약간 지겹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 어머니의 말씀은 마른하늘에 내리는 한 줄기 비였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냉큼 따라나선다. 허약한 체질 탓에 바깥에서 오래 놀지 못했다. 

병치레가 심해 다른 아이들처럼 격렬하게 놀고 나면 꼭 감기를 앓거나 기침이 심해져 오랫동안 약을 먹는 일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돌아와 집 이외의 장소에서는 잘 놀지 않았다. 

그 시절 만화방이 있어 만화를 잔뜩 빌려 보기도 했다. 넉넉한 가정 형편 덕분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졸라 동화책을 사주셨고 아픈 핑계에 집에서 혼자 생활하는 게 무료하지 않았다. 

도시의 시장은 상설시장이다. 농촌처럼 닷새에 한 번 열리는 장이 아니다. 

그렇게 엄마 손을 잡고 가면서 동화책이나 만화책 읽은 내용을 재잘거리고 어머니는 그렇게 재잘거리는 나와 함께 가는 길이 무료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시장에서 파는 물건은 늘 봐도 새롭다. 특히 생선을 파는 좌판에는 생선만 있는 게 아니다. 미꾸라지가 퍼덕거리고 살아 있는 게가 커다란 대형 대야에 담겨 놀고 있다. 가끔 게를 만지다가 손을 비기도 하지만 뭐 그리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엄마에게 야단맞게 되지 않을까 했지만 엄마는 물린 손을 꼭 주어 주셨다. 

시장은 참 재미있는 곳이었다. 사람 구경도 하고 장에서 팔리는 물건 구경도 하고 특히 어머니를 따가 장을 보고 난 뒤에 꼭 시장에서 파는 간식을 사주셨다. 그 간식 먹는 재미에 늘 따라다녔다. 

시장은 그렇게 나에게는 어머니와 함께한 좋은 추억의 장소였다. 그래서 나는 시장을 좋아한다. 

시골 장은 거의 경험해 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선산에 갔다 차편을 맞춘다고 시골 장에서 들러 기름기 둥둥 떠 있는 육개장을 먹은 일이 시골 장에 대한 추억의 전부였다. 

나머지는 TV 드라마에서 본 시골 장이랑 똑같다고 생각하고 지금 사는 산촌의 읍장에 갔다가 크게 실망했다. 

이미 시골도 도시화의 바람을 타고 있었다. 


시골에 들어와 살면서 어지간한 먹을거리는 직접 재배해서 먹으니 장에 갈 일이 별로 없었다. 

환경 문제도 시골에 들어오면서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조금 나이를 먹으면서 그렇게 좋아하던 육식이 줄고 채식과 콩 두부나 재배한 작물에 의존했다. 

가끔 고기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나다가도 그저 한 끼 간단히 해결하고 나면 먹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 속에 숨 쉬고 살다 보니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그래도 장을 볼 일은 있다. 생필품을 산다든지 아니면 생선 한 동가리 사서 찌개를 끓여 먹는다든지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읽는 일이다. 

도시에 살 때는 늘 시장이 열렸지만 여기서는 그야말로 장날! 정해진 날짜에 장이 서는 장날이 있다. 

5일장이 선다. 


한창 무르익어 가는 여름날 이른 아침에 모처럼 아침 공기가 깊은 숲 속 작은 옹달샘에서 솟아 나는 샘물 같이 시원했다. 아침부터 부산 떠는 아내에게

"오늘 장날인데 어떻게 해?"

한 동안 집에만 있었는데 바깥 구경할까 하고 넌지시 물어보는 것이다. 

아내는 배시시 웃으며 앞 무릎 팍 튀어나온 얇은 잠옷 바지를 벗고 짧은 반 바지에 소매 없는 셔츠를 입는다. 나이 오십이 넘었지만 마음은 젊게 살고 싶은지 옷도 조금 젊게 입는다.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가는 세월이 원망스러울 뿐이지 뭐!

집 밖으로 나간 지 한 달이 다되어 간다. 

어지간해서는 나갈 일이 없는 단조로운 시골생활이라 나갈 일이 없으면 그냥 그대로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여름날 텃밭은 냉장고 같다. 호박 오이 가지 상추 고추 토마토 같은 작물이 풍성하다. 굳이 장에 가지 않더라도 끼니에 만들어 먹을 반찬거리가 넉넉하다. 

그리고 사람인지라 바깥나들이의 유혹이 없지는 않다.  단둘이 얼굴 마주 보고 살다 보면 그냥 사람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보는 일은 지루함을 없애는 가장 좋은 시간 때우기다. 

도시의 공원에 연세 드신 분들이 그렇게 나와 있는 이유가 사람 보는 재미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무리 산골에서 땅을 벗 삼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지만 가끔은 사람 냄새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정말 오랜만에 장에 나간다. 집에 세워 둔 트럭을 타고 갈까 했지만 버스를 타고 나가기로 했다. 

손목에 찬 시계를 쳐다보니 10시가 다 되어 간다. 장날만 특별히 10시 반차가 온다. 배낭을 메고 장바구니를 그 속에 집어넣고 마을 어귀에 버스 서는 곳으로 향한다. 

마당을 지니 농로 길을 접어든다. 오랜만에 바깥나들이라 마음이 살짝 들뜬다. 어디 먼 곳을 가는 여행도 아닌데 이렇게 마음이 들뜨는데 하물며 여행을 간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간다. 

오늘따라 햇볕이 어찌 사람의 마음을 잘 읽을까? 아직 오전의 햇살은 그리 피부를 괴롭히지 않는다. 

인적은 드물어 대나무 가지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 소리마저도 크게 들려온다. 가끔 지나가는 차들만이 고요한 정적을 가른다. 

버스를 기다리는 마을 어른들께 인사를 건넨다. 그들도 조금 아주 조금 들뜬 기분이 얼굴에 쓰여 있다. 

먼지와 흙 묻은 옷에 헝클어진 머리 위에 낡은 모자 쓴 모습만 보다가 그래도 깨끗하게 빨아 입은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이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다.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아저씨의 반가운 인사가 모두 버스에 오를 때까지 이어진다. 모두 뉘 집 자식 뉘 집 어른이라는 걸 아는 사이다. 시골 마을버스에서 느낄 수 있는 끈끈한 사람의 냄새다.

차장 밖의 보이는 다랭이 논이 층계를 이루고 각지지 않은 산 모양대로 그려진 논이 자연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장날이라 모두 장으로 향했는지 들녘에는 그야말로 고요하고 귀가 멍할 정도의 적막이 감돌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읍에 장터로 향한다. 길에 서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촌부들의 모습과 왁자지껄한 장터의 소리가 들린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갔던 생각이 절로 떠오른다. 

어쩔 수 없이 가는 마트지만 정말 사람 사는 맛이 나지 않는 곳이다. 시골에 살면서 마트는 잘 안 가게 되지만 어쩌다 가보는 인근 도시의 마트에 가면 그 많은 사람들이 북적여도 사람 살아가는 냄새, 시장에서 느낄 수 있는 비릿한 냄새와 왁자지껄한 맛을 찾아볼 수 없다. 

시장 구경은 제일 마지막으로 돌리고 읍에 있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단조로운 시골 생활에서 얻은 축복이라고 할까! 책을 보는 시간이 많다. 처음 시골로 들어와 읍에 도서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뭐 시골 도서관에 뭐 볼 만한 게 있을까 했다. 아주 오래 학창 시절의 공공 도서관을 생각했는데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서 일까 꽤 많은 신간과 여러 종류의 좋은 책이 많이 있었다. 그 뒤로 도서관은 읍에 나오면 반드시 들리는 코스가 되었다. 그리고 책 몇 권쯤 빌리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시골에 가서 살면 문화생활을 누릴 수 없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문화생활이란 뭘까 

저녁시간에 사람들과 멋진 술집에서 술 마시는 것.

백화점 같은 대형 유통업체에서 쇼핑하고 수다 떠는 것.

이런 것들을 문화생활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조용한 시골에서 책을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끄적여 보는 일이 최고의 문화생활 중에 하나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꼭 도서관을 들린다. 

아내는 아내가 보고 싶어 하는 책 몇 권, 나는 내가 보고 싶은 책 몇 권. 

그렇게 시장을 둘러보고 책을 빌리다 보면 어느새 배가 출출해지는 점심시간이다. 시장 구경 중에 가장 즐거운 일은 먹는 일이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선산 가는 길에 시골 장터를 따라간 적이 있다. 그때 시뻘건 국이 길 가장자리에 걸어 놓은 가마솥에서 설설 끓고 있는 모습은 도시에서 살던 어린 눈에 꽤 신기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벌건 국물에 고기와 둥둥 떠 있는 파가 가득한 육개장이 꽤 먹음직스러웠다. 

그러나 고기 국물이 든 국밥은 사라지고 장날에 중국 음식점이 때아닌 호황이었다. 

바깥 음식은 집을 나서야 먹을 수 있는 시골에 도시처럼 배달해서 먹을 음식도 없다. 

장터에 나오니 짜장면이 제일 먹고 싶다. 늘 밥만 먹으니 분식이나 중국 음식이 그리울 때가 있다. 

읍내에 몇 군데 중국집이 있지만 그중 내 입 맛에 맞는 중국집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중국집에는 모처럼 장에 나온 어르신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약간 느슨해진 분위기 탓인가 어르신들 목소리가 입구 밖까지 들린다. 다들 귀가 어두워지니 목소리가 커 마치 싸움이라도 하는 듯하다. 

조용히 구석진 자리를 자고 앉았다. 뭐 그리 아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지만 먹을 때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다. 

거무스름한 짜장면이 구수한 기름 냄새를 풍기며 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다른 이의 손으로 만든 음식을 먹는 맛이 기가 막히다. 

작은 군청 소재지 읍에 있는 짜장면 집의 짜장면 맛이 다 거기서 거기니 맛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그 달달하고  짭짤한 맛에 기름진 고소한 맛까지 더하니 맛이 기본은 한다. 

읍내 장터에는 밭에 심을 모종을 사느라고 사람들이 분주하다. 모종 파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악을 쓰고, 사는 어르신들은 한 두 개 끼워 달라고 실랑이다. 

시장의 풍경은 역시 가격 흥정이다. 그런 목소리가 사람 사는 세상임을 말해 주는 듯하다. 


죽은 듯 인적 없던  읍내가 모처럼 생기가 넘친다. 어디를 가나 쥐 죽은 듯 조용했는데 북적이는 모습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모처럼 고기 한 근 산다. 김치 넣고 두부 넣은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 장터 주변의 길 위에 가판을 벌여 놓은 아주머니와 할마니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다들 땡볕 아래서 정성스럽게 가꾼 농산물을 가지고 나왔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이 낀 할머니가 옥수수를 팔고 계셨다. 옥수수를 심지 않았는데 아내가 먹고 싶어 한다. 서너 개 샀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환하게 웃는다.

대충 장을 봤다. 뭐 고기 한 점에 주전부리 정도 산 게 전부다. 혹시나 해서 들고 온 장바구니가 무색하다.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출발할 때 보았던 마을 어른들이 다시 보인다. 어디서 점심으로 한 잔 걸치셨는지 얼굴이 약간 상기된듯해 보인다. 할머니들은 그 짧은 시간에 뽀글이 파마까지 하시고 장도 보고 볼 일다 보신 모양이다. 


출발을 기다리던 버스가 시동을 건다. 행여나 차를 놓칠까 사람들이 얼른 올라탄다. 

오전의 그 버스 기사다.

버스기사가 출발한다고 말한다. 

버스 기사 뒤편에 앉은 어르신들을 항해 기사가 한마디 던진다

"오늘 나오시니 좋지예?"

그 말에 할머니들이 일제히 대답한다.

"하모 얼메나 좋은데이! 시장 구갱이 제일 재밌다 아이 가!"
"그러게!"

"하모!" 

"하모!"
버스에 앉은자리의 여기저기서 이구동성으로 튀어나오는 대답이다.

"그라몬 출발하겠심니더! 꽉 잡으이소!"

그렇게 버스는 다시 마을을 향한다. 

늘 하는 일상이 이렇게 그립기는 처음이다.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작고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우리를 행복하게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 작은 일상이 그리웠고 반갑다. 

평범한 작은 일상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행복감이 가슴 가득하다. 열어 놓은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게 빰을 간질인다. 

여름 초록의 풍경이 시원스레 차 창가를 스쳐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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