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아 Feb 08. 2022

자연의 품에서

함박눈이 내리고 뜨끈한 순두부

 가을에 불던 서늘한 바람은 매서운 칼바람으로 변하고 싱그럽던 초록의 생동감은 누렇게 빛을 잃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산골에 겨울이 왔다!

황량한 들녘에는 굶주린 들고양이만이 잔뜩 웅크린 채 먹이를 찾아 헤맨다.

늦은 오후에 힘없이 내리쬐던 초겨울 햇살이 짙은 회색 구름에 덮여 기운이 없다. 

바람을 타고 온 짙은 회색 구름은 푸른 하늘을 사정없이 조각내고 삭풍의 바람이 검은 구름 타고 대지를 사정없이 흔들어 댄다. 

태양은 남은 빛을 있는 대로 끌어 모아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서산 아래로 힘없이 쓰러진다.

검고 무거운 어둠에 먹물 스며들 듯 사방에 어둠이 짙게 퍼진다.  

이제 빛은 사라지고 하늘에는 별빛조차 어둠의 매서운 눈에 몸을 숨긴다.


짙은 여명이 겨울밤 어둠을 밀어내기 힘겹다. 세상의 순리를 거스르지 못하고 어둠은 빛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하지만 오늘은 그 아침 빛이 힘을 내기 어려운가!

바람 소리도 새소리도 들리 않는 고요하고 쓸쓸함 때문일까? 

창으로 비쳐 올 동녘의 햇살이 아직 소식이 없다. 

잠에 취한 눈을 비비며 빛을 마중하러 창가에 섰다. 커튼을 걷는 순간 눈이 부시다. 온 사방이 새하얗다. 

와아~

하는 감탄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마당도 길도 산도 들도 하얀 눈 속에 묻혀 버렸다. 

지금 이 순간 세상은 검고 흰 두 가지 색만이 존재한다. 

한 폭의 묵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늘은 검은 묵에 찍혔고 흰 눈은 종이의 여백이 되었다. 

옆에서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단꿈 젖어 있던 아내가 오만 상을 찡그리며 나를 본다. 

어지간히 잠에 취했는지 얼굴에 짜증이 가득하다. 

손으로 창가를 가리킨다. 

잠에 취한 꺼벙한 두 눈이 커다랗게 변한다.  

와~아

아내의 두 손이 합장하며 입가를 감싼다. 자연이 그려낸 한 폭의 묵화에 쏙 빨려 든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 옷을 입는다. 눈을 본지 오래다. 제대로 된 눈은 군대 시절에 봤던 눈이 마지막이다. 

남쪽의 따뜻한 도시에서는 보지 못한 설경을 놓칠 수 없다.(부산이 고향이다.) 

전원에 사는 또 다른 재미가 하나 더 생겼다.

아직도 창가에는 눈이 내리고 소복이 쌓인 눈을 밟는 감촉을 느끼고 싶어 견딜 수 없다. 

사각사각 뽀독뽀독하는 소리가 벌써 발 끝에 전해지는 기분이다. 

개심 치레 한 눈이 빛나는 눈동자로 변한 아내가 옷을 갈아입었다. 어린아이가 되어 신난다.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나선다. 차갑게 느껴지지만 눈의 포근함이 몸을 덮는다. 

아침의 신선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 속에 묵은 때를 씻어 낸다. 상쾌하다. 

'뽀독뽀독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가 조용히 귀가를 맴돈다. 백색 소음만이 산속 작은 집 마당에 울린다.

첫사랑의 그녀가 나에게 다가온 듯 한 발 한 발 설렘으로 다가온다. 순백의 영혼이 발끝을 타고 온 몸을 휘감는다. 

언제까지 내릴 듯 하얀 눈이 하늘에서 끊임없이 뿌려진다. 하얀 눈을 밟은 발자국을 눈이 다시 덮는다. 

마당 앞 길은 눈 속에 파묻혔다. 어디선가 빗자루 쓰는 소리가 들린다. 윗 집 아저씨가 머리에 벙거지 모자를 쓰고 두꺼운 장갑을 끼고 싸리빗자루로 눈으로 덮인 길을 쓸고 있다. 

철없이 뛰노는 우리 모습이 한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다. 

"눈 좀 쓸어 놔라! 그렇지 않으면 길이 미끄러워 급할 때 차도 못 움직인다!"

너무 싸이면 눈치울 때 힘들다며 밤새 내린 눈을 일단 치우고 눈이 그치고 나서 다시 치우는 편이 수월하다고 말한다. 

이제 시골에 들어와 산지 일 년도 안 된 우리에게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이의 뼈 있는 충고다!

나도 싸리 빗자루를 들고 나와 눈을 쓴다. 밤새 내린 눈을 비질하려니 쉽지는 않다. 눈의 무게는 흰 가벼움 속에 숨긴 비수 같다. 

아내도 덩달아 놀기 삼아 눈을 치운다. 오늘은 여우 같은 아내가 귀여운 토끼로 보인다. 

농로 길을 나가니 마을 분들이 벌써 나와  흰 눈을 소복이 맞으며 쌓인 눈을 치운다. 

낭만과 현실은 역시 다르다. 눈을 치워야 길을 다닐 수 있다. 얼어버리면 그만큼 낭패다. 눈이 조금 잦아들었지만 그래도 눈은 내리고 치운 도로에는 다시 눈이 싸였다. 

그래도 많이 싸이면 눈을 치우기 힘들어진다. 치울 만큼 치우고 다시 치워야 한다는 동네 이장님과 어른들 말씀이 맞겠거니 하며 부지런히 몸을 놀린다. 춥다고 웅크렸던 몸에서는 벌써 열기가 후끈하게 달아 올라 목에 두른 목도리가 답답하게 느껴진다. 

마을 농로와 찻길을 이어주는 곳까지 눈을 치우는데 시간이 꽤 흘렀다. 아랫집 아주머니가 쟁반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종이컵을 들고 모이라고 손짓한다. 눈은 아까보다 더 굵고 세차게 내린다. 

가까이 가보니 믹스커피를 숭늉을 타 듯 타 놓으시고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라고 한다. 

배도 고프고 아침에 일어나 거의 두 시간을 비질했으니 당도 떨어진다. 차가운 날씨에 따끈하던 커피가 미지근 해졌다. 

약간 식은 커피 한 모금이 그래도 언 몸에 따스함을 전한다. 

아침 끼니를 놓쳤더니 배가 고프다.

커피 한 잔으로 주린 배를 막을 수 없다. 마당에서 눈을 밟으며 놀다가 얼떨결에 눈 치우는 일을 하는 아내도 배가 고픈 모양이다. 자꾸 허기진 눈빛을 보낸다. 

눈 치우는 동안 잠깐 얼굴 보이던 부녀 회장님과 아랫집 아주머니와 동네 아주머니 몇 분이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아랫집 아주머니 집 마당에 다들 모여 있었다.  상기된 얼굴에 웃음꽃 가득 피우고 차가운 공기에 벌게진 손을 아래 위로 흔들며 우리를 부른다. 

동네 아저씨들은 뭔가 기대에 찬 미소를 띠며 미끈거리는 길을 밟으며 서둘러 걸어간다. 영문도 모르고 나와 아내도 그 대열에 끼어들었다. 

나와 아내는 집에서 라면 끓여 먹으려 했다. 아무 생각이 없이 얼른 집에 가서 라면을 먹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가 아랫집 아주머니 마당에 있는 널찍한 평상에 먹음직스럽게 놓여있다. 왜 아주머니 몇 분이 보이지 않았는지 이제 이유를 알았다. 떡 본 김에 제사라고 눈이 내려 마음 사람이 모였으니 마을 잔치를 준비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아주머니 한 분이 아내의 손을 낚아채 듯 잡고 가마솥 옆으로 끌어당긴다. 

평상 곁으로 와 모여들었다. 몇 분의 아주머니가 장작불을 꺼내고 냄비를 연다.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맛있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진다.

갈고리를 커다란 냄비 집어넣고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고기 덩어리를 끌어올린다. 

장독에서 빨갛게 익어가는 김장 배추김치 한 덩어리도 평상에 떡하니 자리 잡는다. 

아직 점심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언제 수육과 두부를 데웠을까? 정말 빠른 손놀림이었다. 

소주와 막걸리 맥주가 커다란 평상의 빈 곳을 채운다.

시계는 11시를 향해 가고 있다. 아직도 눈은 순백의 소음을 내며 고요히 내리고 있다.

김장 김치가 흰 눈과 흰 두부와 어울려 붉은 자태를 뽐낸다. 흰색과 붉은색이 묘하게 어울린다. 

큰 평상에 나무 도마를 올리고 시커먼 부엌 칼로 고기를 썰고 두부를 자른다. 

김치에 싸서 두부와 수육을 먹고 한 잔 소주를 걸쳤다. 속 안이 뜨듯해진다. 주린 뱃속에 술 한 잔이 차가운 몸을 녹인다.

눈 덕분에 모처럼 몸을  심하게 움직였다. 덕분에 아침도 거른 뱃속에 때 아닌 호강이다. 

낮 술에 기름진 수육과 한 입 베어 물면 배추 즙이 입 속에서 떠지는 김장 김치의 맛이 어우러졌다. 

산해진미가 따로 없다. 

전날 서녘 하늘에 태양의 빛을 가린 먹구름이 첫눈을 알리는 신호였다. 몰랐지만 마을 분들은 이곳에서 수십 년을 살았다. 

날씨를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젊은 동네 아주머니들(젊어야 육십대다)이 마당이 넓은 아랫집에 모여 두부를 만들었다.  

집에서 만든 투박스럽고 조금 딱딱한 맛이지만 구수한 맛의 두부가 고기와 함께 속을 든든히 해 주었다. 

콩 타작을 하고 김장이 끝나면 매년 마을에서 첫눈이 오면 하는 행사라고 한다. 

아아! 맛에 취하고 술에 취한다.  평상에 둘러 서서 술 한 잔과 나누는 음식은 말 그대로 정이다. 

이른 아침부터 준비했을 아주머니는 힘든 기색도 없이 웃음 띈 얼굴로 사람들을 부른다. 

물론 부녀회 회장님과 몇몇 아주머니들의 모습도 보인다. 함께 두부를 만들어 먹기로 했는데 마침 눈까지 내렸으니 설경에 더하여 입까지 즐겁게 하니 일석이조가 따로 없다. 

뭐 서서 먹는 맛도 꽤 좋다. 싸리 빗자루를 한 곳에 두고 아삭 거리는 김치를 하나 푹 뜯어 두부 한 조각에 싸고 우적우적 씹는다. 

화 아~

감싼 김치의 아삭 거리는 맛이 돌고 다음에 두부의 고소함이 입안에 가득하다. 매콤한 양념이 두부와 어우러져 약간 싱겁던 두부에 간이 베인다. 

옆에 함께 있던 어른들이 나에게 묻는다. 

"어때?"

"예! 맛있습니다." 나는 우렁차게 대답한다. 그 대답 소리에 사람들은 환한 웃음을 띤다. 

시골 사는 맛이 바로 이맛이다. 

사람이 사는 맛이 난다. 나의 시계는 느림의 시계가 되었다. 쫓기는 삶에서 쉬어가는 삶이 되었다. 

자연이 뭔지 모르고 살던 내가 어머니의 품 속 같은 자연에서 사람 냄새 느끼며 진짜 나의 삶을 산다. 잊고 있던 나를 매일 발견하며 산다. 

정이 뭔지 까마득히 멀리 있던 가슴에 따뜻한 정이 다시 다가온다. 


아주머니의 투박한 손이 두부 한모 종이에 둘둘 감는다.

아주머니의 마음이 전해진다. 

집으로 걸어가는 아내가 손을 잡는다. 차가운 대지에 따스한 마음이 추위를 멀리 떠나보낸다. 

어느새 눈이 그치고 대지는 눈부신 새하얀 순결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생활이 때로는 낭만적이고 때로는 생각지도 않은 어려움으로 힘들 때도 있지만 하얗게 뒤덮은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위로를 받고 고소하고 맛있는 손두부처럼 그렇게 사람 냄새 풍기며 참기름처럼 살고 싶다. 


 

이전 07화 자연의 품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