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nes 칸느(칸)에서 한달살이
어느 날 VIP가 여름휴가를 프랑스 칸느에서 보낸다는 말을 들었다. 그 해 아이들 여름 방학 때는 프랑스로 가야겠다는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나도 아이들과 파리가 아닌 칸느로 가기로 결정했다. 아프리카 와서는 늘 나 혼자 아이들과 여행을 다녔기 때문에 이번 방학은 어쩌면 남편이 VIP 수행이 끝나면 아이들이 아빠와 시간을 함께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결국 그건 나만의 꿈으로 끝나고 그곳에서도 혼자서 아이들과 보내야 했지만…) 그렇게 시작된 나의 두 번째 칸느 방문은 일정이 빠듯했던 첫 여행에서 내가 놓쳤던 칸느의 숨어있는 아름다운 장소를 하나하나 발견하는 기쁨으로 낯선 곳에서 한 달 이상 살아야 했던 나에게 전혀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세상의 끝과도 같은 아름다운 도시 칸느.
비유 포르(VIEUX PORT)라 불리는 칸느 항구의 첫 느낌은 맑음과 푸름 그 자체였다.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과 지중해 푸른 바다 그리고 정박해 있는 크고 작은 하얀 요트들이 그림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나는 칸느가 좋다.
저녁을 먹고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항구 주위를 여유 있게 산책하며 눈에 들어오는 멋진 요트들을 감상하는 그 시간들이 좋았다.
신이 선물한 자연의 눈부심과 인간이 만들어낸 도시적인 세련미가 함께 하모니를 만들어 내는 곳,
터질듯한 태양 아래 간간이 불어오는 미풍을 맞으며 여름 도시가 주는 활기찬 느낌을 가득 담은 낮의 칸과
해 질 녘 꼬뜨 다쥐르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타고 내려가는 붉은 태양이 떠난 자리에 남은 한 여름밤의 칸느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이중주… 같은 하루 안에 있는 두 개의 칸느는 그렇게 전혀 다른 모양과 느낌으로 다가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칸느에서 한 달 동안 머무르며 첫 여행에서 잠깐 스치듯 사진만 찍고 지나갔던 칸느의 아름다운 곳들을 천천히 여유로운 시선으로 다시 볼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칸느는 그저 니스 옆에 있는 휴양도시 정도로만 기억된 체 시간이 지날수록 내 기억에서 점점 흐릿하게 소멸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매년 기라성 같은 스타들의 패션쇼를 방불케 하는 멋진 드레스들, 카메라 스포트라이트가 여기저기 터지는 광경들, 그런 것들을 상상하며 세계 칸느 영화제가 열리는 역사의 현장인 팔레 데 페스티벌 콩그레(PALAIS DES FESTIVALS ET DES CONGRES)에서 레드카펫을 밟아보는 순간도 느껴보고, 칸느 시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르 쉬케 (Le SUQUET) 언덕에서 만나는 골목골목 프로방스 느낌 가득한 크고 작은 예쁜 가게들과 집들은 다리 아픈 것도 잠시 잊을 정도로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급 휴양지 느낌인 칸느 시내에서는 맛볼 수 없는 투박하고 소박한 느낌인 르 쉬케에서 하루를 다 써버린 나에게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름다운 석양이 선물처럼 내 눈에 안겼다.
칸느의 화려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담고 있는 해변 산책로인 라쿠아제트(LA CROISETTE) 거리에는 샤넬, 루이뷔통, 크리스천 디올 등의 명품 매장들과 고급 레스토랑, 호텔 등이 있어 그냥 그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파리처럼 혼잡하지 않은 명품샵들이 즐비한 편안하고 쾌적한 쇼핑을 즐길 수 있는 라 크루아제트 거리를 아이스크림 하나 입에 물고 아이쇼핑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 저녁에 호텔로 돌아와 애프터 선크림으로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에 빨갛게 달아오른 피부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들이 너무 즐거웠다.
늦은 아침을 먹고 아이들과 매일 칸느 해변가를 찾았다. 커다란 비치타월을 깔고 남편이 해외출장 중에 사다준 멋진 선글라스를 끼고 바닷가에서 하루 종일 놀아도 지칠 줄 모르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함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돌멩이들이 깔려있어 발이 아팠던 니스의 해변가와 달리 고운 모래사장으로 뒤덮인 칸느의 해변가, 푸름이 가득한 바닷속 하얀 파도가 끊임없이 넘실대며 내게 다가왔다. 여름 한낮의 칸느 해변가는 뜨겁게 달아 올라 있었고 꽁꽁 얼어있던 내 마음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나는 왜 그토록 '칸느'에게 마음이 흔들렸던 걸까...
그동안 많은 곳을 다녀보았지만 이렇게까지 나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곳은 칸느가 처음인 것 같다. 어쩌면 남들의 눈에 담긴 칸느의 모습은 흔하디 흔한 휴양 도시중 하나일 수도 있겠으나,,, 아마도 그건 칸느를 바라보는 나만의 시선 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시야에 잡힌 그곳의 모든 것들은 첫사랑에 빠져 뛰는 가슴을 어쩔 줄 몰라하는 소녀처럼 그렇게 나를 들뜨게 만들었고, 나는 그곳에서 지루하고 뭔가가 늘 불편했던 아프리카 생활에서 완전히 탈출하여 자유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에메랄드빛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간간이 불어오는 짭짤한 바닷바람이 내 볼을 감싸고 나는 다시 사춘기 소녀로 돌아간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들은 마치 잠자고 있던 나를 흔들어 깨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일상을 벗어나 오랜만에 떠난 여행지였던 그곳에는 아프리카에서는 느껴볼 수 없었던 '편안함'과 '편리함'이 있었다. 어느 여행지가 좋았던 이유가 생활의 편리함과 마음이 편안했던 이유라니 참 낭만적이지 않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때의 내 마음은 그랬던 것 같다.
아프리카에서는 쇼핑할 곳이 없어 (정확히 말하면 몇 군데 있기는 하지만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쌌고 물건이 많지 않아 맞는 사이즈를 찾기 힘들어 옷을 구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키가 커서 배꼽이 보일락 말락 하는 티셔츠를 입고 여행을 떠나야 했던 아이들을 데리고 도착하자마자 칸느 쇼핑거리로 유명한 앙티브(RUE D'ANTIBES) 거리로 달려가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뭘 사고 싶어도 살 만한 곳이 없는 곳에 살다가 쇼핑 천국에 온 느낌이랄까? 때마침 쇼윈도마다 붙여놓은 SOLD(세일) 문구가 눈에 뜨였고 내 심장박동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에 들은 종이백 수가 늘어가면서 아이들은 다리 아프다고 나를 조르기 시작했지만 이미 지름신이 내린 엄마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쇼핑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는 쇼핑백들로 가득 찼고 내 지갑 안에는 카드 영수증들로 두둑해졌지만 과소비를 했다는 죄책감 대신 아프리카에서 그동안 잘 참고 견뎌준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작아진 티셔츠를 벗어던지고 사이즈에 맞는 멋진 티셔츠를 입은 아이들은 이제 좀 촌티를 벗은 듯 보였고, 보자마자 바로 사버린 화이트 원피스와 칸느 해변가를 거닐 때 필요한 예쁜 샌들을 신은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며 역시 옷이 날개라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가 처음 2주 동안 지냈던 폴만 칸 멍들리유 호텔은 칸 만과 레랭 제도의 전망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객실에 따라 에스테헬 언덕과 지중해, 그리고 멍들리유 언덕을 볼 수 있다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묵은 방에서는 볼 수 없었다. 폴만 칸에는 호텔 투숙객만 사용할 수 있는 전용 해변과 야외 풀이 따로 있어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이 즐기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다.
특히 주말 저녁에는 호텔 투숙객을 위한 뷔페식 칵테일파티가 있었는데 아이들도 입장이 가능했다.
반바지에 슬리퍼 끌고 갔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남자들은 거의가 세미 정장 차림이었고 여자들도 칵테일 원피스 같은 것들을 걸치고 있었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 안된다는 조항은 없었지만 분위기상 맞춰 입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맞보는 밤의 즐거움이었다. 클럽이나 노래방 같은 유흥 분위기를 느껴보지 못한 게 몇 해인지...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 경쾌한 음악소리들, 그리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멋진 옷차림의 사람들,,,
사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끄러운 곳들을 즐겨 찾지는 않았지만 너무 단절된 곳에 살다 보니 그런 분위기도 가끔은 그리웠었다. 멋진 음악과 아름다운 조명, 맛있는 요리를 즐기며 사람들이 나누는 조곤조곤한 대화 속에 나는 우울하려야 우울할 수 없는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2주 동안의 호텔 생활은 그야말로 나에게 천국 같은 느낌이었다.(호텔 식사에 질려 결국 2주 후에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아파트를 렌트해서 한 달을 보냈지만...) 일 년 내내 변화라고는 하나도 없는, 남편은 해외출장으로 곁에 없는 날이 많았고, 내가 있는 곳이 산속인지 숲 속인지,,, 너무 고요하고 지루하기만 한, 사계절 모두 같은 모습의 아프리카 풍경을 매일 바라보고 사는 느낌이란 철창에 갇힌 새와 같다고나 할까? …
하루하루 똑같이 반복되는 루틴에 지친 나였기에 생동감 넘치고 화려했던 칸느의 모습이 더욱 내 마음에 들어왔던 것 같다.
여행지가 그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유는 그곳에서는 늘 반복되는 나의 '일상'이 없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잠시나마 삼시 세 끼를 챙기지 않아도 되었고, 아침잠에 쫓기며 아이들을 깨워 학교에 보내야 할 일도 없고, 현지인들과의 묘한 신경전에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한국이었다면 나와 닿을 꼭짓점이 전혀 없었을 사람들과의 어색한 관계, 그 안에서 받아야 했던 많은 오해와 상처들,,, 그런 모든 것들이 일어나지 않는 곳,,, 칸느에서 난 자유로움을 얻었고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아프리카의 정적인 삶에 지쳐있던 나에게 칸느는 그렇게 공기처럼 물처럼 빛나는 태양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여행은 일상의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훌훌 털고 떠나기이다.
지금의 나를 잠시 잊고,
새로운 나를 찾아...
긴 여정 끝에 찾은 나는 조금 더 여유롭고,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더 나를 사랑하게 된다.
칸느로 말할 것 같으면...
칸느는 다시 '나'를 찾게 해 준 곳이다.
일상에 지쳐 시들어 있던 나에게 잠시나마
따사로운 햇살과 맑은 공기를 주어 다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너도 그렇게 이쁘게 다시 필 수 있다고,
눈부신 태양과 하얀 바닷바람이 몰려와
그렇게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