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 엄마는 대학생
혼란스럽던 첫째 주와 두 번째 주가 지나고 세 번째 주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5번만 더 반복하면 이번학기도 끝나겠구나라고 월요일 아침 스스로를 다독인다. 나의 전체적인 삶을 본다면 시간이 느리게 천천히 갔으면 좋겠지만 학기가 끝나는 내년 2월은 정말 너무너무 기다려진다.
월요일 데이터 베이스 수업 시간.. 개인과제와 시험으로만 이루어진 가장 평범한 수업이다. 하지만 3주 차에 교수님은 5강까지 진도를 다 빼셨다. 정말 수업 시간 내내 숨이 안 쉬어진다. 속사포 랩처럼 진도를 나가고 사이사이 학생들이 이해했는지 질문까지 하신다. 스마트폰 사용량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수업 시간에 집중하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그날 배운 걸 바로바로 대답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나는 복습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임이 확실하다. 한참 진도를 빼시던 교수님이 이제부터 나갈 챕터는 시험범위에는 포함이 안된다고 하셨다. 그랬더니 앞줄에 앉아 있던 남학생 한 명은 과감하게 책상에 엎드려서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와... 대단하다... 그리고 어떤 학생은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딴짓하는 그들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결단력이 부러웠다. 한다 안 한다를 확실히 정하고 집중과 선택을 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나는 늘 그렇듯 안 한다를 확실히 정할 결단력이 부족해서 오늘도 시험에 나오지도 않는 챕터를 열심히 듣는 척을 했다.
이번주부터 마음 가짐을 바꾸기로 했다. 주말에도 과제를 하고 주중에는 학교에 나와 수업을 들으니 쉬는 날이 없어서 피로도도 높아져만 갔다. 그리고 과제가 계속 있다는 불편한 마음에 아이와 노는 시간에 집중할 수도 없고 집은 집대로 엉망이 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에게도 확실한 주말다운 주말이 필요했다. 토요일 일요일은 남편이 아이를 봐주는 동안 과제를 할 수 있으니 수업이 없는 화요일을 주말처럼 보내기로 했다. 학교 관련된 것은 절대 꺼내지 않고 온전히 나와 가족을 위한 시간을 가지기로 다짐했다. 오전에는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친한 언니를 만나기로 했다. 에스프레소 집에 가서 진하지만 고소한 커피를 마시며 근황을 나누고 일식집에 가서 스시와 우동으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아이 픽업시간까지 시간이 남아서 시내에 가서 쇼핑을 했다. 아 오랜만에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고 나니 스트레스도 풀리고 더더욱 힘이 나기 시작했다. 매주 화요일은 꼭 미타임을 갖자.
수요일은 내일 있을 수업을 준비하는 날이다. 데이터베이스 실습시간에 나온 과제도 있고 영어도 읽어오라는 글이 있는데 수요일 밤 9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아이가 아빠와 함께 자러 들어간 뒤 컴퓨터를 켰다. 이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는 나 대단해 정말... 20년 전 학교 다닐 때와 지금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하하 티처스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가 다시 고등학생이 된다면 더 열심히 공부할 텐데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다시 대학생을 해도 미루는 습관이 그대로인걸 보니 시간을 되돌려 고등학생이 된다 한들 크게 바뀔 것이 없다는 것이 눈에 훤하다. 그래도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과제를 최대한 스스로 해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정답이 있으면 그걸로 제출했는데 이제는 정답이 인터넷에 있어도 그건 따로 보관해 놓고 내가 스스로 문제를 풀고 가져간다. 점수에 대한 부담이 사라졌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밤 12시까지 숙제를 했다. 밤늦게 피곤한 몸으로 컴퓨터롤 오래 보고 있으니 초점이 맞지 않아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문득 왜 내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직업을 관뒀는지가 떠올랐다. 고요한 사무실에 사람들의 자판 소리, 마우스 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고 갈수록 나빠지는 시력, 시큰거리는 팔목, 허리아픔, 프로젝트 때마다 재발하는 위염... 왜 나는 다시 이걸 공부하고 있나 참나... 그래 그래서 관뒀지 싶었다. 그냥 아이가 유치원 졸업할 때까지만 얇고 길게 너무 지치지 않을 정도로만 하자.
목요일 오전 데이터 베이스 실습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교수님이 숙제 잘 해왔냐고 물으셨다. 대답이 시원치 않았는지 교수님이 숙제한 것들을 한 번 봐야겠다고 하시며 교실을 한 바퀴 다 도셨다. 한 명 한 명의 숙제를 다 눈으로 확인하셨다. 숙제 검사의 느낌이 아니라 학생들이 본인의 수업을 얼마나 따라오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교수님은 내 숙제를 보시더니 오케이 틀린 부분이 몇 부분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좋아요라고 하고 지나가셨다. 휴 다행이다. 스스로 한 숙제에 대한 피드백을 받으니 뿌듯했다. 이런 것에 뿌듯함을 느끼다니 초딩이 된 것 같다. 실습 그룹 전체의 30% 정도는 숙제를 아예 안 해왔고 숙제를 해온 학생들 중 80%는 나와 같이 틀린 부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좋다는 평을 받았고 내 옆의 학생은 완벽하게 숙제를 해와서 교수님이 스스로 푼 게 맞냐고 질문을 할 정도였다. 교수님께서는 정답을 도출해 내는 과정을 알려주시고 학생들이 많이 틀린 부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설명을 해주셨다. 교수님과 같이 답을 맞혀가는데 궁금한 점이 생겼다. 문제에서 A방식으로 풀이를 해보라고 제시돼서 그렇게 답을 적었지만 실제적으로는 B방식으로도 접근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B 방식처럼 풀면 아예 안 되는 것인지가 너무 궁금했다. 교수님의 질문이 있습니까?라는 말에 눈 딱 감고 손을 들었다.
"교수님 여기 문제에선 A방법으로 풀라고 제시가 되어 있어서 A처럼 풀었는데 혹시 B 방법으로도 할 수 있나요?"
"아주 좋은 질문이에요! B방법으로도 할 수 있어요. 아마 실제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B 방법이 더 효율적이에요."
궁금증이 해결돼서 좋기도 했고 좋은 질문이라고 해주셔서 넘 신기하고 좋았다. 한국에서는 수업시간에 질문을 할 일도 별로 없고 또 질문은 쉬는 시간에 따로 해왔기 때문에 이런 문화가 익숙지가 않다. 내가 20대 유학생이라면 질문을 매우 망설였을 것 같았지만 여기 같은 공간에 있는 학생들과 아무런 유대관계가 없기 때문에 부끄러움이나 남의 눈치를 볼 것이 없는 것이다. 장점이자 단점이지만 오늘은 장점으로 잘 활용해서 질문의 답도 얻고 나의 컴포트 존을 깨 보았다. 아주 좀 내가 대견했다.
오후 3시 자바 수업을 마친 후 남편이 퇴근하고 올 시간까지 도서관에서 숙제를 하려고 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벌써 학교에 도착해서 아이를 픽업하러 간다고 했다. 나도 얼른 후다닥 짐을 챙겨서 나갔다. 아이와 남편과 함께 캠퍼스에서 조금 시간을 보낼까 했지만 날이 너무 춥고 이미 어둑어둑해져서 차 안에서 바나나 하나를 쥐어주고 곧장 집으로 보냈다. 나도 그 차를 타고 같이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짧게 인사만 하고 집에 간 아이가 눈에 아른거리지만 나에겐 3시간이 수업이 더 남아있다.
오후 5시 45분 영어 수업을 들어갔다. 오늘 수업은 숙제로 내준 글을 가지고 3-4명이 조를 짜서 토론을 하고 발표하는 것이었다. 30분 정도 토론과 수다를 나누고 우리 조가 처음으로 발표를 하게 됐다. 말을 가장 많이 했던 학생이 우리 조의 이야기를 써머리 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그 써머리에서 새로운 질문을 찾아서 반 전체에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질문에 학생이 대답하고 또 다른 학생이 꼬리를 물고 또 다른 학생이 꼬리를 물고 토론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함께 읽은 글은 "우리는 테크놀로지에 중독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였다. 테크놀로지의 정의는 무엇인가? 중독이 무엇인가?로 시작되었던 토론은 게임으로도 화제가 옮겨졌다가 자기 절제로도 갔다가 뇌의 속임으로도 갔다가 다이어트로 화제가 바뀌더니 동기부여로 마무리되었다. 쉬는 시간 없이 두 시간 동안 토론이 진행되었다. 통통 튀는 주제들로 정신 차릴 시간도 없었지만 이런 토론 수업은 처음이었다. 학생들은 서로에게 질문을 했고 동조도 했고 반대도 했지만 어느 누구 하나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았고 물 흘러가듯이 쭉쭉 진행이 되었다. 이 수업이 엄청 멋져 보였다. 그리고 외국애들이 유스호스텔이나 이런데 오면 그렇게 별거 아닌 주제로 말을 길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오늘의 수업이 마음에 들었는지 30분 정도 일찍 끝내주었지만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이미 잠에 들어버린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내일 유치원에서 일찍 픽업해서 시간을 보내면 이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보다 스트레스가 덜하다. 다행이다.
금요일! 오늘은 오전에 자바 실습만 있는 날이다. 얼른 끝내고 아이 픽업해서 집에 가야지!! 자바 실습시간에는 과제로 해온 프로그램을 발표해야 한다. 이 발표 횟수는 엑스트라 점수로 플러스가 된다. 그래서 성적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모든 학생이 치열하게 발표를 하려고 한다. 나는 지난주에 발표를 해서 이번주는 안 해도 되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실습에 들어갔다. 하지만... 지난주에 했던 학생들이 다시 또 발표를 하기 시작했다. 아앗!! 이미 발표를 위한 긴 줄이 생겨서 이제 줄에 선다고 해도 이번 시간에 발표를 하긴 틀렸다. 하아 내가 왜 이렇게 마음 편히 생각했을까? 후회 막심했다. 룰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줄에 선 학생들이 한 명씩 나와서 발표를 하고 있는데 어느 쥐새끼 같은 놈이 실습 시간 끝나는 시간 5분 전에 그냥 성큼성큼 앞으로 나와서 발표자 옆에서 자기 노트북을 세팅하더니 다음 사람의 순서를 낚아채갔다. 인상도 딱 얌체같이 생긴 놈이 생긴 거에 걸맞은 행동을 하니 너무 얄미웠다. 프로젝터에 띄어진 그의 노트북을 함께 보니 과제 중에 못 푼 문제도 넘 많았고 가장 쉬운 부분 두 개를 쏙 골라서 발표를 했다. 저 쥐새끼가 자기 실력으로 점수를 받으면 분명 패스도 못할 실력인데 옆자리에 앉은 천재적인 느낌의 아이와 벌써 기말 시험 대체 조별발표를 같이 하기로 한 것 같다. 휴 증말 너같이 얌체짓 하는 사람은 꼭 벌받았으면 좋겠는데 너는 너의 얍쌉함으로 운 좋게 이 수업 점수를 잘 받겠구나. 씁쓸하다. 그나저나 나는 조별발표 누구랑 하지? 큰일이다. 자발적 아싸는 이런 수업이 제일 싫다. 앞으로 팀 구성 완료까지 3주 더 남았는데 최대한 찾아보고 안되면 혼자 하자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데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모르겠다. 걱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니 접어두자. 오늘은 금요일이다!! 주말을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