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중독자들만 아는 비밀
나는 지독한 일 중독자였고, 그 부작용으로 우울증, 수면장애, 불안장애, 소화장애를 앓았다. 지금도 일부는 만성이 되어, 꾸준히 약을 먹어야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병원비를 수백만 원 쓰고 나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고쳐 나가려 노력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가 나의 '지속 가능한 수준'의 한계인지를 알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마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 분명 많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하루는 몸살감기로 병가를 냈다. 오랜만에 평일 오전 10시에 집에 혼자 있었는데,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아픈 게 문제가 아니었다. 할 일이 없는, 고요함과 적막함이 문제였다. 회사 사람들이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 아무도 내 부재를 눈치채지 못할 거라는 확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아무것도 '생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몸은 아프지만 손은 저절로 노트북으로 향했다. '슬랙만 잠깐 확인해 볼까.'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진정으로 '일' 자체를 좋아해서 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 엉킨 감정이 섞여있는 걸까?
일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복잡한 감정이 있다. 상사가 "이거 좀 부탁할게"라고 말할 때, 겉으로는 "어우, 또 일이네요"라고 투덜거리면서 속으로는 묘한 안도감이 든다. '역시 나한테 맡기는구나.' 부담스럽다고 하면서도 선택받았다는 느낌에 은근히 기분이 좋다.
동료가 "요즘 한가하네요"라고 말할 때는 이상하게 기분이 상한다. 객관적으로는 여유로운 게 좋은 일인데, 왜인지 '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도.
가장 이상한 건 이거다. 정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평화로운 하루가 되면, 무의식적으로 할 일을 만들어낸다. "이 참에 그동안 미뤄뒀던 거라도 정리할까?" 하며 굳이 복잡한 문서 작업을 시작한다.
우리는 고요를 견딜 수 없다
진실을 말해보겠다. 내가 그토록 일에 매달렸던 건, 일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다. 고요함이 무섭고, 그 시간에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면 내가 무가치한 존재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이런 불안감은 고요한 순간에만 나타난다. 바쁠 때는 절대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바쁨이라는 소음으로 불안을 덮는다.
일 중독은 사실 소음 중독이다. 끊임없는 알림, 회의, 데드라인이라는 소음으로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보겠다. 나의 경우엔 "나 없으면 안 된다"는 느낌에 중독되어 있었다.
야근을 하고 있으면 묘한 도취감이 들기도 했다.
'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내가 이렇게 바쁘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야.'
스케줄이 빼곡하면 자존감이 올라간다. 일중독, 자기 효능감 중독은 한 번 맛보면 계속 더 필요해진다. 더 많은 일, 더 큰 책임, 더 복잡한 문제들을 찾아 헤맨다. 가장 무서운 건 내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제까지 만족시켜 주던 바쁨의 강도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더 센 자극이 필요하다. 더 늦은 퇴근, 더 많은 프로젝트, 더 큰 스트레스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일에 중독된 게 아니라 '바쁜 나'에 중독되었다
실제로 일의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의미 있는 프로젝트든 쓸데없는 회의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 자체다. 존재 증명의 도구로서의 일. 그래서 휴가를 가서도 일을 한다. 쉬고 있는 나는 쓸모없는 나 같아서. 생산적이지 않은 나는 의미 없는 나 같아서. 그런데 이것은 지속 가능한 방법이 아니었다. 몸이 아프고, 정신이 아프고, 결국 나는 휴직계를 내고 몇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인생의 방향키를 천천히 돌리기
일 중독에서 벗어나는 건 깨달음 하나로 되는 일이 아니다. 다만 이런 나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일을 사랑해서 이러는 거야"라는 거짓말 대신, "나는 일하지 않는 나 자신이 무서워서 이러는 거구나"라고 솔직해지는 것부터 시작이다.
그다음은 삶과 일을 조금씩 분리해 보는 연습을 시작했다. 퇴근 후 노트북을 열기 전에 "정말 지금 해야 하나?"라고 한 번만 물어보기, 주말에 업무용 카톡을 확인하기 전에 3초만 망설여보기, 무엇보다 나 자신을 돌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나를 잘 먹이고 있는가?'
'충분히 재우고 있는가?'
'내 몸이 보내는 신호들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주변이 정돈되어 있는가?'
일 중독자들은 자기 자신을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회사 일정은 완벽하게 관리하면서 정작 자신의 식사나 수면은 대충 때운다. 남의 일은 꼼꼼히 챙기면서 자신의 건강검진은 계속 미룬다. 인생의 방향키를 '일'에서 '나'로 돌리는 것. 이건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매일 조금씩, 아주 천천히. 어떤 날은 실패하고, 어떤 날은 다시 일에 매달릴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완벽하게 바뀌어야 한다는 강박마저 또 다른 일 중독의 형태일 수 있으니까. 그렇게 조금씩 변화하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변화하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알게 될 것이다. 바쁘지 않아도, 생산적인 시간으로 삶을 꽉 채우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도 충분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