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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상사를 퇴근시키는 방법

정신적 퇴근을 해야 진짜 퇴근이다

by 최지현

퇴근 후 침대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오늘 그 일이 생각났다.

'아 그때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할걸.'

'발표자료 한 장 더 추가했으면 어땠을까.'

괜히 속상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깐. 평소 친구들한테는 "괜찮다, 충분히 잘했어" 이런 말 잘해주면서, 왜 나한테만 이렇게 까칠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내 머릿속에서 말하고 있는 이 목소리가,
정말 '나'일까?


그러고 보니 이건 어렸을 때 "대충 하면 안 된다"던 엄마, "한 번 더 체크해 봐"던 첫 직장 상사, "더 노력해야지"던 고등학교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내재화된 비판자(internalized critic)'라고 한다. 외부에서 들어온 평가와 기대가 내 안에 자리 잡아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더 무서운 건 이 내재화된 목소리들이 원래 주인들보다 훨씬 더 가혹하다는 점이다. 실제 엄마나 상사라면 "오늘은 충분히 했어, 이제 쉬어"라고 말해줄 상황에서도, 내 안의 그들은 여전히 "더 해야 해"라고 속삭인다.


'머릿속 상사'가 탄생한 진짜 이유

내 머릿속에는 상사가 한 명 있다. 머릿속 상사는 왜 생겨났을까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사실 이 친구는 나를 괴롭히려고 온 게 아니다. 불안정한 세상에서 나를 보호하려고 온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학습했다. 더 잘해야 인정받고, 더 완벽하고 남보다 앞서야 살아남는다고. 이런 학습이 수십 년간 반복되면서, 우리 뇌는 생존 시스템을 구축했다. 바로 '끊임없는 자기 감시'라는 시스템을.


특히 한국 사회에서 30대 여성으로 산다는 건 더욱 복잡하다. 일도 완벽하게, 외모도 관리하고, 인간관계도 원만하게. 그러면서도 '너무 나대지는 말아야' 한다. 늘 적당하게 행동해야 살아남는다. 이런 모순적 요구들이 우리 머릿속에 24시간 감시관을 배치한 것이다.

머릿속 상사는 말한다. "더 열심히 해야 해. 다른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잘하고 있어. 방심하면 뒤처져."

이 목소리의 정체는 바로 불안이다. 경제적 불안, 사회적 배제에 대한 불안, 혼자 남겨질 것에 대한 불안. 자본주의 사회에서 '쉬는 것은 게으른 것'이라고 세뇌당한 우리의 집단무의식이다.


정신적 퇴근의 진짜 의미

그날 밤 나는 질문을 바꿔봤다.

"머릿속 상사를 어떻게 쫓아낼까?"가 아니라 "왜 나는 충분하다는 감각을 잃어버렸을까?"

우리가 정신적 퇴근을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완벽주의 때문이 아니다. "지금의 나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감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인다.


"더 많이 가져야 해"

"더 높이 올라가야 해"

"더 완벽해져야 해"


그 결과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현재 미완의 나'를 항상 부족한 존재로 여기게 됐다.

머릿속 상사는 이런 시스템의 산물이다. 그래서 이 친구를 단순히 쫓아내려고 하면 안 된다. 대신 재협상을 해야 한다.


머릿속 상사와의 재협상법


첫 번째 단계는,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를 안다. 나를 보호하려고 왔구나. 고마워."

머릿속 상사를 적으로 만들지 말자. 이 친구는 불안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려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다음은, 그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본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기준이 필요해. '더 완벽하게'가 아니라 '충분히 의미 있게'로."

성공의 정의를 바꾸는 것이다. 남들보다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미를 느끼는 일을 하는 것.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진 것에서 만족을 찾는 것.


마지막으로, 그와 나 사이에 선을 적절히 그어야 한다.

"업무시간에는 너의 의견을 듣겠어. 하지만 퇴근 후에는 휴식 모드로 전환한다."

머릿속 상사에게도 노동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진짜 퇴근'을 하자

정신적 퇴근은 한 번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도, 연습하면 늘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여전히 어렵다. 호르몬의 변화나 몸 상태, 큰 프로젝트의 데드라인과 같은 외부 변수들에 의해 머릿속 상사 놈이 목소리가 커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질문한다.


"지금 말하는 게 정말 나를 위한 거야? 아니면 불안해서 히스테리 부리는 거야?"


완벽한 해결책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안다. 내 가치가 생산성으로 측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쉬는 것도 권리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의 나도 충분히 괜찮다는 것을.


머릿속 상사가 "더 해야 해"라고 말할 때, 이렇게 대답하자.


"적당히 하세요!"

오늘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나머진 내일의 몫으로 남겨도 별 일 안 생긴다. 이제야 진정한 퇴근이 가능해졌다. 오늘 하루도 수고한 당신, 뿌듯한 마음으로 '진짜 퇴근'을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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