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이 아닌 전략적 철수다
사람들은 '빤스런' 그러니까 '도망'을 부정적으로 본다.
'도망친다', '포기한다', 이런 말들은 책임감 없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다른 개념으로 빤스런을 재정의하고자 한다.
도망이 아니라 '전략적 선택'이라고.
어릴 때부터 들어온 말이 있다. "끝까지 해봐야 안다", "포기하면 안 된다", "버텨야 성장한다". 이런 말들에 길들여져서 나는 오랫동안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나약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30대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적절한 도망도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인 실력이고, 지능이라는 걸.
무능한데 인성도 주옥같은 상사가 있는 팀에서 빤스런? 현명한 선택이다. 내 정신건강과 커리어를 지키는 일이니까. 나를 무시하고 이용만 하려는 친구와의 관계에서 빤스런? 당연한 결정이다. 그런 관계는 나를 시들게 만들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니까. 결혼을 전제로 만났는데 상대가 계속 회피만 하는 연인과의 관계에서 빤스런? 시간 절약이다. 내 청춘, 2-30대가 얼마나 소중한데. 언제 버틸지, 언제 떠날지를 아는 것. 이게 바로 생존 본능이고 지능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전략적으로 도망을 치는 것은 고도의 판단력이고, 높은 수준의 지능을 필요로 한다.
'참는 것이 미덕'이라는 가스라이팅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당연한 선택을 망설일까? 바로 한국 사회가 참을성을 과도하게 미화해 왔기 때문이다.
"신입은 3년은 버텨야 한다", "이 정도 고생은 다들 한다", "지금 그만두면 나중에 후회한다".
이런 말들에 우리는 길들여졌고, 가스라이팅 당해왔다고까지 생각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를 망가뜨리는 직장에서 3년을 버티는 게 과연 나를 위한 일일까? 매일 아침 출근하기가 싫어서 위가 아프고, 상사의 부당한 대우에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지고, 야근에 찌들어 건강이 망가져도 "경험치가 쌓인다"며 버텨야 하는 걸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나를 다치게 하면서까지 견뎌야 할 상황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일도, 관계도,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낙원은 기대도 안 했어
어쩌면 우리는 세상으로 하여금,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직장, 완벽한 상사, 완벽한 연인, 완벽한 친구.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 낙원 같은 곳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지옥 같은 곳에서 버텨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나를 망가뜨리는 곳에서는 절대 머물면 안 된다. 나만의 기준선이 있다. "이 정도면 괜찮다"와 "이건 정말 아니다" 사이의 선 말이다. 이 선을 넘나드는 상황에서는 타협할 수 있지만, 아예 선을 넘어버린 상황에서는 과감히 발을 빼야 한다.
동물들을 보면 위험한 상황에서는 본능적으로 도망친다. 그게 자연스럽다. 생존 본능이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이 본능을 억압하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자기 보존 본능은 억압할 게 아니라 존중해야 할 감각이다. 내 몸이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라고 신호를 보낼 때, 내 마음이 "이 사람과 있으면 상처받는다"라고 경고할 때, 그 신호를 무시하지 말자.
민감한 사람일수록 이런 신호를 더 빨리 감지한다. 그리고 그게 바로 장점이다.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나는 이제 내 직감을 믿는다. 첫 만남에서 "이 사람과는 맞지 않겠다"는 느낌이 들면 억지로 관계를 이어가지 않는다. 새로운 직장에서 "여기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빨리 다른 곳을 알아본다.
결국 '빤스런'도 용기다. 익숙한 것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용기 말이다. 물론 무턱대고 모든 것에서 도망치라는 건 아니다. 성장을 위한 적당한 고통과 나를 파괴하는 독성적 상황은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견딜 가치가 있지만, 후자는 절대 견뎌서는 안 된다.
나를 성장시키는 고통은 이런 것이다.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는 과정, 실력 향상을 위한 노력, 건강한 관계에서의 소소한 갈등.
그리고 인격 모독, 일방적 착취, 정신적 학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소모적 관계는 나를 파괴하는 상황이다.
구분이 안 될 때는 이 질문을 해보자. "이 상황이 3개월, 6개월, 1년 더 지속된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까, 아니면 더 망가진 사람이 될까?" 답이 후자라면, 지금 당장 빤스런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도망을 잘 치는 것도 능력이다. 언제 떠나야 하는지 아는 것도 지혜다. 나를 다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과감히 발걸음을 돌리는 것. 그게 바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어차피 낙원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옥에서는 절대 살지 않겠다. 그 사이 어디선가, 내가 웃을 수 있는 곳에서 살아가겠다. 그게 내가 찾은 생존의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