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회사'라는 감사한 사실
1년 동안 준비한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엎어졌는데도 내가 바득바득 우겨서 결국 출시했다가 망했다. 결국 시장의 선택을 받지 못했고, 여러 외부 변수들로 인해 그 서비스는 이제 없어졌다. 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생각과, 고생한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에, 눈물이 났다. 눈물 젖은 엽떡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10년 차 직장인이, 3년째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이렇게 허탈해해도 되는 건가? 퇴사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퍼뜩 든 생각. 나 너무 과몰입하고 있는 거 아니야?
"프로젝트가 엎어졌다고 해서,
내가 망한 건 아니잖아?"
과몰입이라는 함정
열심히 일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어서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회사 일을 내 일처럼 생각했다. 팀의 성과가 곧 내 성과라고 믿었다. 하지만 과몰입할 때 일어나는 일들은 이상했다.
상사가 은근히 성과 압박을 하거나, 기분 나쁜 말을 하면, 그게 꿈에 나올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동료가 실수해서 깨지기라도 하면, 내가 더 속상하고 화가 났다. 회사 실적이 안 나오면 내 자존감까지 바닥으로 떨어졌다. 굳이 그렇게까지 받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를 내가 사서 받고 있었다. 정작 나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그다지 노력하지 않았던 것 같다. 퇴근 후에도 회사 일 생각에 잠을 못 자고, 주말에도 메일 확인하고, 친구들과 만나서도 회사 얘기뿐이었다. 좋은 걸 챙겨 먹거나 운동을 하지도 않았고, 마음 챙김도 하지 않고 독서도 전혀 안 했다.
어쩌면 나는, 회사에, 일에, 프로젝트에
내 자아를 의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재밌는 사실은, 그렇게 과몰입한다고 해서 성과가 잘 나고 일이 잘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를 갈아 넣고, 진심을 쏟으면 그게 성과로 돌아오던 때가 있었다. 그건 딱 10년 차 이하까지였다. 이제부터는, 그러니까 중간관리자 단계에서부터는 회사에 너무 과몰입하는 것이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트리는 것 같았다.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면 되던 때가 아닌, 문제를 해결하고 꼬인 것들을 교통정리 해야 하는 관리자가, 너무 나서서 애쓰니까 막혀 있는 문제는 더 막히고, 창의적 해결책보다는 보여주기식 미봉책만 나왔다. 내가 힘들게 일할수록, 팀 효율성은 바닥을 쳤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이게 다 이유가 있었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우리 뇌의 작업 용량을 잡아먹어버린다는 거다. 스트레스를 처리하느라 정작 중요한 일에 쓸 뇌의 자원이 부족해지는 거였다. 더 놀라운 건, 1908년에 이미 이런 게 연구됐다는 거다. '야키스-도슨 법칙'이라고 하는데, 적당한 스트레스는 성과를 높이지만 과도한 스트레스는 오히려 성과를 떨어뜨린다는 거였다. 내가 경험한 게 바로 이거였다.
'정신적 퇴근'이라는 발견
그래서 실험을 해봤다. 신경을 조금 껐다.
"어차피 내 회사 아니야. 내가 모든 걸 책임질 필요는 없어."
처음엔 무책임한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별 일이 안 생겼다. 오히려 막혔던 문제가 저절로 풀렸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해결책이 보였다. 동료들도 각자 역할을 찾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경을 덜 쓰니까 나는 조직에서 '더 믿음직한 사람'이 되었다.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으니까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고, "쟤는 매사에 침착하다"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서,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매일 100% 이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은 30%, 어느 날은 120% 이렇게 들쭉날쭉 하는 것보단, 내 에너지의 70% 정도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훨씬 유능한 관리자라는 것을 꺠달았다. 힘을 빼니까, 중요한 순간에 제대로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중요한 순간에 임팩트 있게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회사와 나는 남남'이라는 진실
그런데 왜 우리는 회사와 이렇게까지 일체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할까?
한국 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길들여 왔기 때문이다.
"회사에 충성해야 한다"
"조직에 헌신하는 게 미덕이다"
"회사 일을 내 일처럼 해야 인정받는다"
이런 말들에 우리는 가스라이팅 당해왔다.
하지만 진실을 말해보자. 회사와 나는 남남이다. 회사는 내 노동력을 사고, 나는 내 시간을 판다. 그게 다다. 회사가 망해도 내 인생이 끝나지 않고, 회사가 잘되도 내가 자동으로 행복해지지 않는다. 이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게 편해진다.
'남의 회사'라는 축복
생각해 보면 '남의 회사'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가 거리 두기를 시작한 후 첫 번째로 든 생각이었다. "아, 이게 내 회사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실패해도 괜찮다. 다음 프로젝트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할 때 "망하면 어쩌지?" 대신 "재밌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패해도 내 인생이 끝나지 않으니까.
성장 기회를 공짜로 얻는다. 회사 돈으로 새로운 스킬을 배우고, 회사 네트워크로 사람들을 만나고, 회사 리스크로 경험을 쌓는다. 이보다 좋은 거래가 또 있을까?
언제든 떠날 수 있다. 더 좋은 곳이 있으면 미련 없이 갈 수 있다. 모든 걸 걸 필요가 없다. 몇 달 전에 후배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선배는 어떻게 그렇게 여유가 있어요? 저는 맨날 전전긍긍하는데." 그때 답해줬다. "나도 예전엔 그랬어. 그런데 어느 날 깨달았지. 여기는 남의 회사라는 걸." 후배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대충 일하시는 거예요?"
"아니, 오히려 더 잘해. 부담이 없으니까 더 창의적으로 할 수 있거든."
그 후, 달라진 것들
이 방법들을 쓰기 시작하면서, 아침에 일어나는 게 수월해졌다. 예전엔 눈 뜨자마자 회사 생각에 속이 쓰렸는데, 이제는 여유가 생겼다. 실패가 무섭지 않다. 새 프로젝트를 맡아도 "망하면 어쩌지?" 대신 "이것도 재밌겠네"라고 생각한다. 실패해도 내가 망하는 건 아니니까.
무엇보다 팀원들이 더 편해해 한다. 내가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으니까 팀 분위기도 안정됐다. "팀장님은 믿을 수 있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의외다. 가끔 과몰입하고 싶은 순간이 온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힘을 빼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걸. 별일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