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동안 기분 나쁘게 일하고 싶지 않아요
연봉협상은 '삔도'의 문제다.
돈을 더 받고 싶어서? 물론 그것도 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1년 동안 기분 나쁘게 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연봉협상이 기대만큼 잘 안되면, 뭔가 모를 억울함이 생긴다. 회의실에서 상사 얼굴 볼 때마다 미묘한 감정이 올라오고, 야근 요청이 왔을 때도 '내가 왜?'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동료가 칭찬받는 걸 보면서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기 어려워진다.
이게 바로 연봉협상 실패의 진짜 비용이다. 월급 몇십만 원의 문제가 아니라, 1년간의 직장 생활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 그런데 왜 하필 연봉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질까?
연봉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연봉은 단순히 '돈'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1년 동안 바칠 시간, 에너지, 창의력, 심지어 건강까지의 총합에 대한 회사의 평가다. '내 시간의 가격표'인 셈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는 하루 8시간 이상을 회사에서 보낸다. 주말에도 업무 걱정을 하고, 휴가 중에도 메일을 확인한다. 친구들과의 약속을 미루고, 가족과의 시간을 줄여가면서 회사 일을 한다.
그런데 연봉이 내 기대에 못 미친다면? 그건 단순히 돈이 부족한 게 아니라,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자원인 '시간'에 대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연봉은 내 존재 가치를 수치화한 것이다. 회사가 나를 얼마나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는지, 내 기여를 얼마나 인정하는지가 숫자로 나타나는 것. 그래서 연봉 이야기만 나와도 마음이 복잡해진다. 내 존재 전체가 평가받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연봉협상은 권력관계의 재협상이다
연봉협상은 표면적으로는 금액을 정하는 과정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권력관계를 재협상하는 과정이다.
회사와 나 사이의 힘의 균형을 확인하는 순간. 내가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 회사가 나를 얼마나 붙잡고 싶어 하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연봉협상에서는 단순히 돈만 오가는 게 아니라 서로의 진심이 교환된다.
"이 정도면 충분하죠?"라고 하는 회사와 "더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라고 하는 나 사이의 줄다리기. 이 과정에서 내가 이 조직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미래에도 함께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가 결정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협상이 상호 간 '미래에 대한 베팅'이라는 점이다. 회사는 "이 사람이 내년에 이만큼의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베팅하고, 나는 "내가 그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라고 베팅한다. 그래서 연봉협상은 과거 성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미래 가능성에 대한 투자다. 회사가 나에게 거는 기대와 믿음의 크기가 연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연봉협상에서 실패한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덜 받는 게 아니라, 내 시간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내 존재가 낮게 평가받으며, 회사 내에서의 위치도 확인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회사가 내 미래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자존감과 직결된다. 연봉이 오르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라, 내 가치가 인정받았다는 느낌 때문이다. 반대로 연봉협상이 실패하면 모든 게 의미 없게 느껴지는 건,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봉협상 후 1년 동안의 직장생활이 달라진다. 성공하면 더 적극적으로, 실패하면 더 소극적으로. 같은 업무를 해도 몰입도가 달라지고, 같은 상사를 봐도 느끼는 감정이 달라진다.
마치 춤을 추듯 협상을 하자
대부분 연봉협상을 전투라고 생각한다. 나 vs 회사, 이기거나 지거나. 하지만 진짜 잘하는 사람들은 협상을 춤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 마치 춤을 추듯이 함께 호흡하고 손 발을 맞춰가야 한다.
"저는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싶어요. 그러려면 회사의 투자가 필요하고요."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연봉을 달라는 게 아니라 함께 성장할 방법을 찾자는 제안이 된다.
나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용기도 필요하다. 협상 테이블에서는 '얕보여선 안된다'는 게 일반적인 조언이다. 하지만 때로는 오히려 진정성과 솔직함이 더 강력할 수 있다.
"사실 저도 확신이 서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이 회사에서 더 크고 싶거든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런 접근이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을 열 수 있다. 완벽한 척하는 사람보다 성장하려는 사람에게 더 투자하고 싶어 한다.
침묵의 기술도 필요하다. 원하는 연봉 금액을 제시하고 나서는 입을 다물어라. 먼저 말하는 사람이 진다. 어색한 침묵이 흘러도 참아라. 상대방이 먼저 말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거절당해도 바로 대답하지 마라. "음... 그렇군요. 좀 생각해 볼게요"라고 하고 시간을 벌어라. 즉석에서 나온 반응은 대부분 감정적이다. 그리고 역질문을 활용하는 것도 좋다.
"얼마를 원하세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숫자를 말한다. 하지만 질문으로 받아쳐보자.
"팀장님이 생각하시기에, 제가 내년에 어떤 성과를 내면 이 정도 연봉이 합리적일까요?"
이렇게 하면 상대방이 내 가치를 스스로 정의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춰 성과를 낼 수 있는 구체적인 로드맵도 얻을 수 있다.
거절당했을 때, 재센티망을 넘어서
연봉협상이 실패했을 때 억울함이 올라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저 사람은 별로인데 더 받는다던데?', '이 회사는 공정하지 않아.' 이런 감정을 니체는 '재센티망(ressentiment)'이라고 불렀다. 단순한 분노가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그 좌절감을 상대방이나 시스템을 탓하는 것으로 해소하려는 깊고 끈질긴 원한이다.
재센티망의 특징은 이렇다. 직접적으로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대신 속에서 끓인다. "어차피 저 사람은 줄 잘 서서 올라간 거야", "이 회사는 실력보다는 정치질이 중요해", "나 같은 사람은 여기서 인정받기 어려워"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이런 생각이 일종의 도덕적 우월감을 준다는 점이다. '나는 저들과 달리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야. 그래서 손해 보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현실을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연봉협상에서 실패한 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재센티망에 빠진다. 회사를 탓하고, 상사를 탓하고, 시스템을 탓한다. 그리고 그 탓하는 과정에서 묘한 위안을 얻는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세상이 불공정한 거야.'
하지만 재센티망은 독이다. 당장은 마음이 편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나를 갉아먹는다. 계속 피해자 의식에 머물러 있으면서 현실을 바꾸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포기하게 만든다.
진짜 성숙한 사람은 재센티망을 넘어선다. 연봉협상이 실패했을 때 억울함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감정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왜 실패했을까? 내가 부족한 부분은 뭘까?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행동한다. 더 나은 성과를 내서 다음 기회를 만들거나, 정말 내 가치를 인정해 줄 다른 곳을 찾아본다. 어떤 선택을 하든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진짜 이기는 협상
연봉협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돈이 맞다. 그런데 돈이 전부는 아니다. 나를 제대로 평가하고 존중하는 조직에서 일하고 있는가를 연봉협상 과정을 통해 우리는 회사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다. 내 성과를 제대로 보고 있는지, 내 미래를 함께 그려가려고 하는지, 아니면 그냥 적당히 부려먹을 직원 정도로 보고 있는지. 그리고 나 자신도 변화한다. 내 가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당당하게 요구하며, 결과를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한 뼘 더 성장한다.
결국 연봉협상은 돈을 더 달라고 떼쓰거나 설득하는 것을 넘어서, 내가 내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고 나 자신을 세워가는 과정이다. 1년 동안 기분 나쁘게 일하고 싶지 않다. 그러려면, 우선 내가 나를 존중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자신 있다면, 상대에게도 그에 상응하게 행동힐 수 있게 된다. 나는 이만한 자격이 있는, 충분히 가치로운 사람임을 언어적, 비언어적으로 모두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시작이 바로 연봉협상 테이블에서 진짜 이기는 협상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