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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억울함이 발생하는 근본적 이유에 대한 고찰

일은 내가 다 했는데 왜 박수는 쟤가 받는가

by 최지현
억울함은 저축이다.

30년간 대기업에서 치열한 조직 생활을 거쳐 LG에너지설루션 CEO까지 오른 권영수 부회장의 이 한 마디를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이해가 안 됐다. 3개월 밤샘해서 만든 기획서를 상사가 자기 공인 양 유세하고, 하지도 않은 말과 행동으로 뒷담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실수까지 "네가 확인했어야지"라며 내 책임이 되는 상황들이 어떻게 저축이 될 수 있다는 거지?


억울함이 생기는 진짜 이유

억울함은 기대의 산물이다. 우리는 직장을 공정한 곳이라고 믿고 있다. "열심히 하면 인정받는다", "실력이면 충분하다"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즉 능력주의의 환상에 익숙해져 있다. 말하자면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공정하게 평가받는 사회. 우리는 어릴 때부터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 간다", "성실하게 일하면 승진한다"는 식으로 학습받아왔다.

하지만 조직은 애초에 공정한 곳이 아니라 정치적 공간이다. 순수한 능력만으로 모든 게 결정된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회의에서 내가 제안한 아이디어를 모두가 무시하다가, 10분 후 부장님이 똑같은 말을 하니까 "좋은 생각이네요"라고 받아들이는 상황. 아니면 같은 날 지각했는데 나는 혼나고 옆 동료는 "교통사고 있었나 봐요" 하며 넘어가는 경우. 능력이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요소들이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핵심은 '가시성의 정치학'이다. 조직에서는 실제 성과보다 '보이는 성과'가 더 중요하다. 의사결정권자들은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없으니까, 가장 가시적인 순간의 기여도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회의실에서 발표하는 사람이 새벽까지 자료 만든 사람보다 더 많이 기억된다. 또 다른 문제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감정을 맡겨놓는다는 점이다. 상사의 기분, 동료들의 질투, 조직의 정치적 역학. 내가 아무리 잘해도 이런 것들은 바꿀 수 없다. 그런데 이것들이 내 노력에 비례해서 따라올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올 때마다 억울할 수밖에.


억울함이 저축이 될까

권영수 전 CEO의 말처럼 억울함이 정말 저축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우선 억울한 경험은 현실 감각을 만든다. 표면적인 규칙과 실제 게임의 룰이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는다. 이런 현실 감각은 나중에 더 큰 조직에서, 더 복잡한 상황에서 큰 자산이 된다. "아,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는 직감이 생긴다.

그리고 '감정 조절 능력'은 곧 리더십 자산이 된다. 억울한 상황을 겪으면서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 상급자가 될수록 더 많은 억울함과 부조리를 마주하게 되는데, 이미 그런 경험이 축적된 사람은 더 안정적으로 팀을 이끌 수 있을 테니까.

억울함이라는 감정을 다른 관점에서 보려는 시도를 해보려 한다. 이 감정이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너 지금 남의 기준으로 살고 있어'라는 신호일 수 있겠다. 내가 아직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상사의 인정, 동료들의 칭찬, 조직의 보상. 이런 외부 기준으로 내 가치를 측정하려고 하니까 그것이 예상대로 오지 않을 때 억울한 거다.


억울함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

일단 억울한 감정이 올라올 때 첫 번째로 할 일은 '지금 내가 억울해하고 있다'라고 자각하는 것이다. 감정에 휩쓸려서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하루 정도 시간을 두고 자기 객관화를 해보자. 다음 날 맑은 정신으로 다시 생각해 보면, 어제의 솟구치던 감정은 가라앉고, 상황을 더 냉철하게 바라보고 대응 전략을 짤 수 있게 된다. 다음 단계는 '이 억울함을 어떻게 써먹지' 고민해 보는 거다. 가시성이 부족해서 성과를 인정받지 못했다면 '셀프 브랜딩 스킬'을 키워야 한다는 신호고, 정치적으로 밀렸다면 '네트워킹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모든 성장엔 고통이 따른다. 이왕 억울함이라는 고통이 왔으면, 성장의 동력으로 삼아버리자.

물론 말이 쉽지, 필자도 그때는 정말 억울해서 별 난리를 다 쳤었다. 지금 보니까 그 억울함들이 나를 지금의 자리까지 밀어 올린 연료였던 것 같다. 당연히 지금도 울컥하는 일들이 종종 생기지만, 이제는 다르게 생각한다. "아, 또 성장할 기회가 왔네."

억울해하고 있는 당신도 알아두면 좋겠다. 지금의 억울함이 미래의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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