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하게 버티는 삶에 관하여
존엄하게 버티는 삶의 자세
나는 한 번씩 내가 컨트롤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우울감이나 무기력함을 느낀다. 혹시 나 같은 사람이 있다면, 필자가 나름대로 찾은 '이 삶을 존버하는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일단 청소부터 한다. 천장이 꺼질 것처럼, 몸이 침대 아래로 푹 꺼지는 것처럼, 가위에 눌린듯한 우울감에 빠진 상태에서 '청소'라는 행위는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한다. 그래서 애초에 집 천제를 깨끗하게 치우겠다는 장엄한 계획은 세우지 않는다. 그저 눈앞에 것들을 조금씩 치우는 거다.
지구만큼 무거운 내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침대 위에 있는, 방금의 나처럼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이불과 베개를 털고 정리한다. 그 옆에 쌓여있는 옷가지들을 행거에 걸거나, 세탁기에 넣는다. 세탁기 앞까지 왔다. 오랜만에 세탁기 한 번 돌려볼까. 큰 결심을 하고 세제를 털어 넣고 시작 버튼을 누른다. 뭔가 시작되는 느낌이 든다. 살짝 달라진 기분으로 물 한잔 마시러 냉장고로 향한다. 싱크대에 쌓여있는 그릇들을 보다가, 도저히 설거지까지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물을 마시려면 컵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래. 딱 컵만 씻자 하고 수세미에 세제를 퐁, 퐁, 거품을 내고 온 힘을 다해 수도꼭지를 연다. 물소리, 수세미가 유리컵에 뽀득뽀득 닿는 느낌. 무아지경으로 나머지 설거지까지 다 해치웠다. 세상에. 너무 깨끗해졌잖아. 내친김에 바닥에 쌓인 먼지들도 청소기와 밀대걸레로 말끔하게 닦아낸다.
청소하는 게 무슨 대단한 의식인 양 써놓았지만, 무력감이라는 늪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숭고한 싸움인지. 치열한 자기 극복의 과정인지 알 것이다. 우울감의 핵심에는 '학습된 무기력'이 있다고 한다. "내가 뭘 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경험을 반복하면, 뇌는 결국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라고 학습해 버린다. 이건 단순히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뇌가 생각과 판단을 담당하는 부분의 활동을 줄이고, 공포와 불안을 담당하는 부분이 과활성화된 상태라고 한다. 보상 시스템이 둔감해지면서, 뭘 해도 의욕이 안 생기고 보람을 느끼는 것이 몇 배로 힘든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런데 희망적인 건, 이게 학습된 거라면, 반대의 행동과 보상체계로도 학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청소인가
'통제감의 회복'.
우울할 때 우리가 잃는 가장 큰 것은 통제감이다. 내 삶이 내 손을 떠난 것 같은 느낌. 뭘 해도 소용없을 것 같은 느낌. 이 느낌이 무력감의 핵심이다. 그런데 눈앞에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더러운 컵과 접시들을 깨끗하게 만드는 건, 내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인 것이다. 내 손이 움직였고, 나를 둘러싼 이 공간이 바뀌는 과정이다. 내 세상이 나의 행동으로 아주 조금, 바뀌게 되는 숭고한 순간이다.
이건 우리 뇌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나는 여전히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실제로 한 연구에서 수년간 사람들의 일기를 분석했는데, 결과가 꽤 흥미롭다. 사람들의 동기부여와 행복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큰 성공이나 보상이 아니라,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의미 있는 일에서의 진전'이었다고 한다.
진전. 나아감.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있다는 느낌. 그게 필요했던 거다. 나에게는.
'공간'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
나를 둘러싼 공간이 정돈되면 머리도 조금씩 정돈되는 느낌이 든다. 이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뇌가 공간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는다. 한 뇌 과학 연구를 보면, 어질러진 환경에 있을 때 우리 뇌는 여러 자극들을 동시에 처리하느라 과부하가 걸린다고 한다. 이게 의사결정을 방해하고, 정신적 피로를 유발하고,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를 높이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공간을 정돈하면 뇌가 처리해야 할 자극이 줄어들면서 정신적 에너지가 확보되고, 그 에너지로 다른 것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간은 중립적이지 않다. 우리가 공간을 만들지만, 공간 또한 우리를 만든다. 어질러진 환경 안에서 무력감은 증폭되고, 정돈된 공간 안에서 통제감은 회복된다.
행동이 먼저, 감정은 나중에
우울할 때, 무기력할 때는 무언가를 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기분에 상관없이 움직여야, 기분이 나아진다. 실제로 우울증 치료에서 중요한 원리라고 한다. 감정이 행동을 만드는 게 아니라, 행동이 감정을 만든다는 것.
기분이 나아지길 기다리면, 무력감만 증폭된다. 대신, 행동을 먼저 한다면, 정말 힘이 하나도 없어도 눈 딱 감고 일단 움직이면, 뇌의 화학작용이 바뀌기 시작한다. 보상 물질이 분비되고, 시스템이 조금씩 다시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청소는 쉽게 나를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실용적인 방법이다. 결과가 즉각적이고 가시적이고, 신체적 움직임을 수반하며, 성취감이 명확하다. 또한 전문 기술이 필요 없고, 실패가 없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부담이 적다. 이걸 알고 나서부터는, 청소할 때 이것을 마치 어떤 숭고한 의식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냥 집안일이 아니라, 내 뇌를 다시 훈련시키는 과정이라는 것. 그 엄청난 것을 내가 해내고 있다는 느낌. 학습된 무기력을 다시 학습된 통제감과 자신감으로 바꾸는 과정인 것이다.
나에게 청소란, 내가 여전히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것이다. 작더라도 확실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 나는 내 삶을 스스로 관리하고 돌보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작지만 확실한 성취를 반복한다. 우울감과 무력감이 완전히 나아지진 않아도, 최소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변화의 시작이 아니던가. 이게 내가 삶을 존엄하게 버티는, 존버하는 방법이다. 오늘도 성실하게 존버하는 모든 이들에게,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