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리센티망 개념으로 본 당대의 자기 계발 담론
기존의 자기 계발을 호기롭게 부정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한다. 자기 계발은 자아 탐구 코스프레를 콘텐츠화한 상업용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생각한다. 당신은 진정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가?
너무 센가? 그래도 말해야겠다. 내 주변에 자아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자신이 누군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자 했으며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는지 모를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이런 물음이 나올 것이다.
"작가 너는 네가 누구인지 아는가?"
나도 아직 다 모른다. 그런데 내가 나를, 자신을 탐구하는 여정이 나의 삶이라는 것을 알 뿐이다. 내 이름, 나이, 학력, 커리어, 외모적 특징, 이런 것들을 전부 걷어내고 난 '진짜 나'는 누구인지에 대하여.
당대의 자기 계발 산업이 촉구하는 것은 불행하게도 '진짜 나'를 찾아가는 자아 탐구가 아닌, 니체가 말한 '리센티망'에 국한되어 있는 듯하다. 리센티망(Ressentiment)을 쉽게 설명하면, '약한 자의 복수심이 도덕적 개념으로 포장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해보겠다.
직장에서의 리센티망은 다음과 같다. 실력도 별로인데 정치질을 잘하는 동기가 승진한 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할 수 있다. 첫 번째, 직접 대응하는 방법은 그 동기와 정면 승부하거나, 나도 줄을 서거나 택일을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리센티망적 대응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저런 식으로 승진하는 건 비열해. 나처럼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하는 게 진정한 직장인이야."
또 다른 예시로, SNS에서 예쁘고 돈 많은 인플루언서가 부럽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직접 대응은 나도 예뻐지고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리센티망적 대응은 "저런 건 허영이야. 진짜 아름다움은 내면이 중요한 거야. 나처럼 소박하게 사는 게 진정한 삶이야"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방법이다.
리센티망의 핵심 메커니즘은, 선망하는 대상에 대하여 직접 대항할 힘이 없다는 전제하에 있다. 실력, 외모, 돈 등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현실을 인정하기 싫다는 감정이 있기에, 이 고통을 줄이고자 상대방의 가치를 '나쁜 것' 혹은 '저급한 것'으로 뒤바꾼다. 동시에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선함'으로 포장한다. 이에 대한 가치판단은 본 글에서 하지 않겠다. 다만 자기 계발 산업이 이걸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당신이 성공 못한 건 도덕적이어서야.
하지만 이 방법을 쓰면 도덕적이면서도 성공할 수 있어!"
결국 원망을 희망으로 포장해서 파는 것이 현대 자기 계발의 핵심 USP이다. 현대 자기 계발 산업은 매우 정교하게 리센티망을 상품화한다. 먼저, 개인이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을 상품으로 판다. '당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메시지로 끊임없는 결핍감을 조성하고, 현재 자아에 대한 불만족을 건드린다.
그다음엔 '성공한 자들의 비밀'과 같은 판타지를 심어준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신격화하고, 그들의 '특별한 무언가'를 돈 주고 살 수 있다고 유혹한다. 성공한 자, 강한 자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심을 자극하며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어'라는 희망으로 포장하여 파는 것이다. 이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자기 계발 산업이 발전하면서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양질의 콘텐츠를 쉽게 얻을 수 있고, 자아 탐구와 자기 계발에 적절히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돌리거나, '네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아서'라는 죄책감을 원동력 삼아 시장이 형성된다는 점이다.
모든 산업은 리텐션(재구매)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므로, 자기 계발 산업도 끊임없는 업그레이드 모델이 나온다. 한 번 사면 끝이 아니라 계속 다음 단계, 다음 레벨이 있다고 하며, 그것을 믿고 사서 소비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부족한 나'로 남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진짜 나'에 대한 탐구는 애초에 관심이 없고, 정의되지 않은, 아니 감히 타인이 할 수 없는 '이상적인 나'를 영원히 추구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문제인 것이다. 이게 니체가 경고한 데카당스의 현대적 버전인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자아 탐구를 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자아와의 만남을 필사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왜 회피하냐면, 진짜 나를 마주하면 견딜 수 없는 공허함과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 "내 삶에 특별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깨달음 앞에 자유로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는 자기 계발 상품들로 그 공허함을 채운다. "나는 지금 부족하지만 계속 발전하고 있어"라는 내러티브로 현재의 진짜 나와 마주하는 걸 미뤄버릴 수 있다.
더 무서운 건, 진짜 자아를 발견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완전히 뒤엎어야 할 수도 있다는 걸 무의식 중에 알고 있다는 거다.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 지금과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있다. 그럼 지금까지의 선택들, 관계들, 커리어가 다 의미 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결국 우리가 하는 건 진짜 변화는 거부하면서 변화하는 듯한 착각만 유지하기가 아닐까. 안전한 범위 내에서의 자기 계발을 흉내 내는 것이다. 근본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그렇다면 진짜 자아 탐구란 무엇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고정된, 본질적인 자아가 내 안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발견되길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자기 계발적 사고의 함정일지도 모른다. 자아는 발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매 순간의 선택으로, 매 순간의 거부로, 매 순간의 긍정과 부정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 작업은 끔찍할 정도로 고독하고 불안한 일이다. 아무도 답을 줄 수 없고,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심지어 내가 만들어가는 자아가 옳은지 그른지도 판단할 기준이 없다. 사회의 기준도, 종교의 기준도, 자기 계발서의 기준도 모두 의심해야 하니까. 그리고 끝내 실패할 수도 있다. 자아 창조의 과정에서 완전히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정말로 허무와 마주칠 수도 있다. 자기 계발 상품들처럼 '안전한 성장'이란 게 없다. 진짜 자아 창조는 항상 절벽 끝에서 걷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것을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필자의 수준에서는 답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니체라면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가치로 사는 것도, 사회가 정해준 틀에 맞춰 사는 것도, 자기 계발 상품으로 자위하는 것도 결국 죽음과 다름없다. 진짜 살아있다는 것은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고,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고,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추함과 약함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초라한 마음도, 안전함에 안주하려는 비겁함도, 변화를 두려워하는 소심함을 인정하는 것. 이런 나를 발견하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 그것뿐이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가면을 쓰는 일도, 미움받는 게 무서워 진짜 말을 숨기는 일도 그만둬야 한다. 더불어 기존 가치체계를 파괴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성공하면 행복하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안정이 최고다" 같은 관념을 의심하고, 때로는 완전히 거부해야 한다. 이건 의도적 혼란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혼란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태어난다.
이 모든 과정을 견디면 무엇이 남을까? 진짜 자유가 남는다. 남의 승인 없이도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힘, 불확실함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 세상의 모든 유혹과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생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온전한 책임감을 갖게 된다.
당신은 진정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이 질문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매일매일 다시 써나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한 일이자, 가장 인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