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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토끼 Apr 21. 2024

(이별편) 우산

BGM. 허각. 물론

그를 만난 건 비가 세차게 오는 어느 날 밤, 지영이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나오던 길이었다. 나처럼 우산이 없어 보이는 사람인데, 어째 우리 학교 학생 같진 않은 느낌. 문 앞에서 10분을 기다리고 20분을 기다렸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다. 늘 오지 않았던 엄마인데, 알면서도 난 무엇을 기다렸던 걸까. 빗속을 뛰어보려 머리에 손을 얹고 출발하려는 순간, 낮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우산 없으면, 조금만 기다렸다 같이 갈래요?”

”아, 네…“


어색한 10분이 더 흐르자, 하얀 얼굴의 한 여자가 우산을 들고 그에게 왔다. 그러자 그는 지영에게 우산 하나를 건넸다. ”이거 쓰고 가요. 얘랑 난 같이 쓰고 가면 되니깐. “ 여자친구인가 눈을 흘기면서도, 그 사람의 오른쪽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이 쓴 우산은 크지 않아 그의 어깨는 이미 비에 젖고 있었다. ”저기, 우산 돌려드릴게요. 전화번호 알려주세요. “  그렇게 지영은 그와 닿을 연락책이 생겼다.


며칠 뒤, 학교 앞에서 둘은 만났다. 그날도 지영의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던 그 시간에, 우리가 이전에 비를 피하고 있었던 바로 그 문 앞에서. 우산을 건네며 처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얗고, 안경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베이지색 바지에, 카라티가 잘 어울리는, 진짜 어른 같은 사람이었다. 언젠가 지영이 어른이 되면, 너른 캠퍼스를 거닐다가, 우연히 만나서 얘기를 나눌 것만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근데 대학생이 왜 고등학교 앞엔 와 있었어요? “  

“동생이 우산을 안 가져간줄 알고, 가지러 주러 왔었지.”


그날부터, 비가 오는 날이면 그는 우산을 들고 학교 앞에 그녀를 데리러 왔고, 그들은 함께 걸었다. 지영은 우산을 가지고 온 날에도 그가 건네는 우산을 쓰곤 했다. 이제 지영은 우산이 없어도, 엄마가 그녀를 데리러 오지 않아도 무섭지 않았다. 빗속에서도 훈훈한 밤바람이 둘 사이를 통과하던 그 여름밤에도, 그들은 함께였다. 지영은 비가 더 자주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오늘은 자율학습 시간에 선생님이 갑자기 들어와서는 소리치시는 거예요. ‘야, 거기 웃은 사람 누구야!’ 전 원래 진짜 안 웃는데, 선생님의 그 말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버린 거죠. 그렇게 재수 없게 걸려가지고 손바닥 3대 맞았잖아요. 진짜 왜 하필 그 순간에 웃음이 터져가지고…”


지영은 딱히 공부를 잘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학교 생활은 성실하게 하는 학생이었다. 친구가 많지도 않고, 작은 목소리에, 말이 없는 소녀였다. 적당히 큰 키에, 야리한 몸매, 평범한 외모를 가진 고등학생이었다. 그런 그녀는 그를 만나기만 하면,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쏟아내었다. 별 것 없던 그녀의 시간들은 그의 앞에선 모두 별 것이 되었다.


“수능이 코앞인데, 나는 진짜 잠을 잘 자요. 다른 애들은 잠을 못 잔다더라구. 밤에 라디오 들어봤어요? 난 나중에 어른이 되면, 라디오 DJ가 되고 싶어요. 내가 예전에 중학생 때도 방송을 했던 적이 있었거든. 들어보고 싶지 않아요? 내가 나중에 들려줄게요.”


“근데 오빠는 나 데리러 올 땐 우산을 가지고 오면서, 왜 본인은 정작 비 오는 날 우산을 안 가지고 다닌다는 거예요? 난 우산이 없으면, 진짜 속상해. 꼭 있어야 하는 무언가가 없는 기분이라니깐. 그러니깐 우산 챙겨 다녀요. 하여튼 이상한 사람이야.”


재잘대는 그녀를 그는 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일일이 씹어내기라도 하는 듯이, 그는 가만히 들어주었다. 가끔씩 그녀의 이야기에 그가 미소를 짓기도 하고, ‘음, 음.’ 하고 마치 대답을 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그런 그의 모습이 그저 좋아서 그녀는 더 방긋거렸다. 주로 나란히 걷던 탓에, 지영은 항상 그의 오른편 얼굴을 바라봐야 했고, 간혹 마주치는 얼굴을 한번 더 보려고 깡총깡총 뛰기도 했다. 지영은 이야기를 하다가 신이 나서는, 가끔 그의 팔을 살짝 치기도 하고, 잡기도 했는데, 듬직한 어른의 팔이 느껴지면 머리가 아득해지기도 했다. 지영은, 수능이 끝나고 어른이 되면, 그에게 멋지게 고백하리라 다짐했다. 어색해서 한 번도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는데, 그날만큼은 ’ 오빠‘라고 불러보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 비가 오던 밤, 지영은 그가 있는 대학교로 향했다. 예쁜 흰색 원피스를 차려입고, 이제는 책가방이 아닌 작은 핸드백도 손에 들었다. 오늘은 내가 우산을 건네주겠다고, 이번엔 둘이 따로 우산을 쓰는 것 말고, 같이 한 우산을 쓰겠다고, 그녀의 허리까지 오는 큰 우산을 손에 꼭 쥐었다.


대학이라는 곳은 작은 고등학교 교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거대한 정문 안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게 건물들과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아득히 먼 거리에 있는 한 건물에서 그가 나오는 것 같았다. 많은 대학생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즐거워 보였다. 그 대학생 무리는 망설이지 않고 비를 맞으며 어딘가로 달려갔다. “야, 너 이 새끼야, 빨리 오라고!”  그들은 크게 소리지르며 웃었고, 이 정도 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우산이 필요하지도 않아 보였다.


지영은 가만히 돌아섰다. 마치 그녀가 아는 건 그의 이름뿐이었던 것 같이 그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늘 그녀의 공간에서 그를 만났고, 늘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왜 그가 가끔씩 그녀를 보러 오는지, 왜 거기에 있어주는지 한번도 묻지 않았고, 그의 답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우산이 되어 주었지만, 그는 우산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아 보였다.


그가 나온 문과대학 건물 입구에, 조용히 들고 온 우산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고백도 마음도 그곳에 쿵-하고 내려놓으며, 다시 어두운 길을 따라 정문을 향해 가만히 걸어 나왔다.



image: Evgeni Tcherkasski on unsplash





 BGM. 허각 <물론>


가진 게 그리 많진 않아

어쩌면 많이 부족할지 몰라

가끔 나와 다투기도 하겠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네게

나보다 좋은 사람 많겠지만

널 사랑하는 맘 나 그것만큼은 자신 있는 걸


내리는 비를 막아 줄 수는 없지만

비가 오면 항상 함께 맞아 줄게

힘든 일이 있어도 기쁜 일이 있어도 함께 할게

물론 모든 걸 다 줄 수는 없지만

작은 행복에 미소 짓게 해 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너의 편이 돼줄게 언제까지나


세상이 그리 쉽지 않아

몇 번씩 넘어지곤 할지 몰라

꼭 잡은 두 손만 놓치지 않고선 함께 가면 돼


내리는 비를 막아 줄 수는 없지만

비가 오면 항상 함께 맞아 줄게

힘든 일이 있어도 기쁜 일이 있어도 함께 할게

물론 모든 걸 다 줄 수는 없지만

작은 행복에 미소 짓게 해 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너의 편이 돼줄게 언제까지나


https://youtu.be/Na3dPzWMe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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