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성시경, 너는 나의 봄이다
손바닥마한 뭉게구름이 온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일요일 아침, 수이는 항상처럼 노트북을 싸 들고 카페로 향한다. 조용한 음악이 나오는 카페에서, 향긋한 커피와 함께, 평일에 못했던 할 일들을 정리하는 이 시간은 수이가 가장 행복해하는 시간이다. 어쩌면, 평일에 너무나도 바쁘게 달려온 탓에, 여유롭고 딱히 할 일이 없는 이 시간이 더 소중한 건 아닐까.
수이가 카페에 도착한 일요일 오전 8시, 카페엔 유독 사람이 없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고요한 시간, 오직 그녀만의 시간. 길을 건너려고 기다리는 그 순간, 그녀는 카페 주차장을 힐끗 본다. 텅 빈 주차장. 그래, 그럴 리 없지.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앉는다. 아 그러고 보니, 창가에서도 주차장이 보이네. 시간이 지날수록 차가 한 대, 두 대 주차장을 메운다. 그러나 그녀가 보고 있는 한 자리는 끝끝내 메워지지 않는다. 그녀의 눈빛이 향하는 끝이, 서서히 흐려진다.
'넌 굉장히 자신만만해. 그리고 차가워.'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 수이는 43세, 흔히 말하는 골드미스다. 큰 외국계 회사에서 아주 잘 나가는 임원이고, 아쉬울 것 없이 일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는, 흰 피부에 키가 크고 늘씬하고 딱 붙는 정장치마가 잘 어울리는, 숏컷 스타일. '수이 씨는 왜 결혼 안 해? 아, 혹시 돌아온 건가?' 하는 말은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다. 그렇지만 그녀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의 삶은 적당히 행복하고, 딱히 불행하지도 않으며, 나쁘지 않다.
수이가 그와 이별한 지는 한 달째다.
회사일이나 그녀 자신의 여러 가지 일들에 집중하던 그녀의 마음속에 그는 서서히 스며들었다. 처음엔 친구 같이, 말이 너무 잘 통해서 그와 대화하는 시간이 마냥 즐거웠다. 점점 솔직한 삶의 이야기들을 하다 보니,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고, 그녀의 가장 가까운 편이 되어 주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 겪었던 사회의 폭력과, 강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녀만의 사연과, 그 모든 걸 겪으면서 났던 마음속 상처들까지 그는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그냥 듣고만 있는 그를 보며 그녀는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묵묵히 그녀를 지키기 시작했고, 그렇게 그녀의 닫혀 있던 마음은, 열렸다.
설명하지 않아도 그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은 눈이 부셨다. 차가운 그녀는 그에게만큼은 봄날처럼 따스한 사람이 되었고, 그녀의 모든 순간은 온통 그로 가득 찼다. 흑백이었던 그녀의 순간들에 색깔이 입혀졌다. 그녀가 좋아하는 순간과 모든 것을 그도 좋아했고, 그녀는 점차 스스로와 그를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와, 그녀는 이별했다.
이별을 선택한 것도 순전히 그녀의 결정이었다. 그와 함께할 미래를 그리기엔 그녀 스스로의 삶을 우선시했고, 함께를 위해 그녀의 일부를 양보하지 못했다. 내가 참 이기적이지,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선 행복한 스스로를 버렸다. 이별은 예고되었지만, 준비는 미처 하지 못해서, 어쩌자고 그렇게 갑자기 찾아왔고,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견뎌내야만 했다. 오랫동안 잊고 지넀던 이별의 감정을 느껴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왜 수많은 이별들은 준비되지 않은 채로 찾아오는 걸까. 왜 수많은 사랑들은 끝을 알고서도, 그렇게 끝까지 달려내는 걸까. 참, 바보 같단 말이지.
울다 쓰러지던 20대, 30대 때의 이별과는 다르게, 그가 없는 그녀의 일상은 딱히 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는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청소도 하고, 쇼핑도 하고, 주말엔 이렇게 카페에 나와서 작업도 하면서 잘 지내고 있었다. 회사 동료들과 수다도 떨고, 웃기도 하면서, 그를 만나기 이전의 그녀의 모습처럼 그렇게 잘 지내고 있었다. 오히려 이제 혼자를 위한 시간이 많고, 연애를 할 때 종종 서로 서운해하고 싸우던, 감정의 소모가 없어 편안했다. 그녀는, 아프지 않았고, 그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지도 않았으며, 꽤 괜찮았다.
카페에서 비어있는 주차장의 한 자리를 흐려진 눈으로 바라보며, 그녀는 닿을 수 없는 그에게 물었다.
'나 꽤 잘 지내고 있어. 감정이 막 요동치지도 않고, 당신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거나 하지도 않거든.
나, 편하게, 잘 지내고 있는 거 맞지?'
이윽고 수이의 눈은 파랗고 예뻐서 부서질 것만 같은 하늘로 향했다.
언젠가 그가 '맑은 수정 같다'라고 말했던 그녀의 눈물이, 미처 참아내기도 전에 볼을 타고 흘러버렸다.
한 줄기, 두 줄기 흘러내리다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린다. 목이 메인다.
'근데 말야, 마음에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해.
자주 가던 카페에 혹시라도 차 한 대가 서 있진 않을지, 자꾸만 살펴봐.
울리지 않는 SNS 알람이 켜지진 않는지, 계속 보게 돼.
어떤 노래가 귀를 스치면, 모든 게 당신 이야기 같아.
예쁜 하늘을 보면, 누군가가 내 생각을 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행복한 순간이 오면, 당신이 곁에 있었다면, 하고 생각해.
당신이랑이었다면 더 행복했을 텐데, 하고 말야.
역시 내가 좋아하는걸 제일 잘 아는 건 당신인데, 하고 말이지.
그러다 보면 눈빛이 갈 곳을 잃고, 코 끝이 시큰해져.
당신이 딱히 보고 싶지는 않아.
근데, 언제가 되면, 이 구멍이 메워지는 거야?
늘 당신은 나한테 답을 알려줬었잖아.
나, 잘 지내고 있는 거 맞아?'
그녀는 그가 보고 싶지 않다.
다만, 돌아오지 않을 그를 가만히 기다릴 뿐.
눈부신 이 계절이, 봄꽃이,
괜히 야속한 날이다.
BGM. 성시경 <너는 나의 봄이다>
어쩌자고 난 널 알아봤을까
또 어쩌자고 난 너에게 다가갔을까
떠날 수도 없는 이젠
너를 뒤에 두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네 모습뿐인걸
언젠가 네가 했던 아픈 말
서로를 만나지 않았다면
덜 힘들었을까 너는
울고 있다 참고 있다
고갤 든다 아프게 웃는다
노을빛 웃음
온 세상 물들이고 있다
보고 싶다 안고 싶다
네 곁에 있고 싶다 아파도
너의 곁에 잠들고 싶다
처음 그 날부터 뒷걸음질 친 너
또 처음 그 날부터 이별을 떠올렸던 나
널 너무 갖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었던 것들
차가운 세상 서글픈 계산들
아무리 조심해도 애써도
아무리 아닌 척 밀어내도
이미 난 네가 좋아
보고 싶다 달려간다
두드린다 넌 놀라 웃는다
동그란 웃음 온 세상 다 어루만진다
울지 마라 가지마라
이제는 머물러라 내 곁에
넌 따뜻한 나의 봄인걸
아직 망설이는 네 마음 앞에
그래도 멈추지 못할 내 마음
내겐 남은 두려움 너를 안고 안아
내 품이 편해질 때 까지
울고 있다 참고 있다
고갤 든다 아프게 웃는다
노을빛 웃음 온 세상 물들이고 있다
울지마라 가지마라
이제는 머물러라 내 곁에
넌 따뜻한 나의 봄인걸
마침 널 만나게 된
너는 나는 따뜻한 봄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l8It450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