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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토끼 Mar 17. 2024

(이별편) 기억상실

BGM. 노을, 전부 너였다

어느 토요일 아침, 소정은 길을 나선다. 파란 하늘, 선선한 바람, 소정이 가장 좋아하는 아침 공기 내음. 저 멀리 카페 앞에 지원이 나와있다. “지원아!!!” “응, 빨리 왔네?” 싱그럽게 그녀가 웃는다. “얼른 들어가자 우리. 뭐 마실래? 따뜻한 아메리카노 디카페인이지? “ ”아냐, 오늘은 단 게 땡기니까 카라멜 마키아또 먹을래.” 항상 아메리카노만 고집하던 소정이 어쩐지 오늘은 달달한 커피를 찾는다.


지원은 소정의 가장 친한 친구다. 고등학교 1학년에 만났으니 벌써 20년 가까이 된 소울메이트. 이쯤 되면 가족사부터 매일매일의 생활, 서로의 취향과 성격까지... 서로 모르는 게 없다.


6개월 전부터 이 둘은 지원의 카페에서 매주 토요일 아침에 만나서 대화를 한다. 친구 소정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다. 단풍이 색을 입어가던 어느 가을날, 소정은 회사 앞 사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후 선행성 기억상실증 판정을 받았다. 그 이후 하루하루 메모를 해가며 기억을 되살리고, 또 되살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 사고 이전의 기억들도 사진을 보면서 하나하나 되새겨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은, 봄이 오고 있음이 느껴지는 3월이다.


“지원아, 어제 메모했던 것들은, 아침 토스트와 커피, 요가, 바이올린, 파가니니, 저녁은 샐러드.”

“아, 그랬구나! 좋아, 어젠 바이올린으로 파가니니 곡 연주를 한 거야? 대단한걸! “

“그러게, 진도가 쭉쭉 나가서 기분이 좋아. 오늘도 집에 가서 연습을 좀 더 해야겠어!” 하면서 소정은 메모장에 ‘지원이, 카라멜 마끼아또’라고 적는다.


둘만 있던 카페에 점점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지원아, 난 괜찮아, 가 봐도 돼. 좀 이따 또 얘기하면 되지. “ 소정은 지원을 보낸다. 일하는 지원을 바라보고 있으니 꽤 뿌듯하다, 내 친구 참 멋지네. 어린 나이에 벌써 카페 사장님이 된 친구가 새삼 자랑스럽다. 나도 얼른 회사에 복귀하게 되면 참 좋겠는데... 내년엔 할 수 있으려나, 소정은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머리가 아파올 땐 기도하는 습관이 생겼다. 기도를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뭐든 잘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랜데... ‘이윽고 내가 한눈에 너를 알아봤을 때 모든 건 분명 달라지고 있었어. 내 세상은 널 알기 전과 후로 나뉘어.‘  무언가 숨겨진 기억에 얽혀있는 소리나 감각이 느껴지면 어김없이 두통이 시작된다. 지원이는 일하고 있어서 부를 수도 없는데... 소정은 또 눈을 감는다,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이제 그만 힘들지 않게 해주세요, 뭔지 모르겠지만 기억이 다시 날 수 있게 해 주세요... 기도하는 노력이 무색할 만큼, 잊혀진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다.


저 멀리서 지원은 눈을 감고 찡그리고 있는 소정을 바라본다. 소정아, 또 아프구나, 너.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는 무력감에, 친구를 바라보기만 한다. 미안해 소정아, 그런데 이 기억은 돌려주고 싶지 않아.


3년 전, 소정이 이별했던 기억. 비가 많이 오던 어느 날 밤에 소정은 비를 흠뻑 맞은 채 지원을 찾아왔었다. “지원아, 나 오늘 헤어졌어.”  소정이 너무 사랑했던 사람, 그와 함께 있을 땐 정말 나다울 수 있었다고 자랑했던 사람. 누구보다 서로 잘 맞았고, 누구보다 서로 인연이라 생각했던 사람. 빈틈없이 행복하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던 사람. 그런데, 그런 그와 헤어졌다니. “야, 소정아, 너 감기 걸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비를 맞으면 어떡해” 울면서 무너지는 소정을 지원은 힘없이 붙들고 있을 수밖엔 없었다. “있지... 지원아, 가슴을 좀 떼냈으면 좋겠어, 여기가 너무 아파. “ 마치 눈물을 닦을 힘도, 숨을 쉴 수 있는 힘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바스러지는 가을날 마른 잎처럼, 그녀는 무너졌다.


소정은 그렇게 긴 시간을 아파했다. “나 있지,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 그냥 모든 순간에 그 사람이 있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잊어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누가 좀 지워주었으면 좋겠어... “  


어떻게 잊어야 할지 모르겠다던 소정은, 사고가 난 후 거짓말처럼 그 기억을 하나도 남김없이 잊었다. 그리고 지원은, 그 기억을 굳이 살리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소정이 다시 눈을 떴다. 이제 좀 나아졌나 보다, 하고 지원은 안도한다. 마침 손님들이 한 차례 빠진 틈을 타서 지원은 소정에게 가 본다.그리고 밝은 목소리로 묻는다, “소정아, 이 딸기케이크, 우리 카페에 새로 들여오려고 하는데 한번 먹어볼래?” 소정은 거짓말처럼 다시 해맑은 미소를 띠며 대답한다, “오, 맛있겠다!” 그리고는 메모장을 연다. ‘지원이, 카라멜 마키아또, 딸기케이크’


“지원아, 오늘은 정말 행복하다, 온통 달달한 기억들로 남을 것 같아! “

환한 소정의 미소에 지원도 덩달아 미소 짓는다.

“그러니깐! 소정아, 우리 행복한 기억만 하자! “


image: unsplash, Miguel PInto





BGM. 노을, < 전부 너였다 >


가슴을 떼어 놓은 채 살 순 없나요

아무런 느낌도 없는 채로

눈물을 닦을 힘도

숨 쉴 힘도 이제는 나 없죠

그대는 숨죽여 속으로 울겠죠

나보다 더 힘들겠죠

다음이 또 있다면 그땐 늦지 않게

마음껏 더 사랑할 텐데

내가 살아온 모든 행복을 더해도

우리의 짧은 날만 못하죠

어떻게 잊을까요 어떻게 견뎌낼까요

나는 기도해요 사랑이 우스운 나이까지

단숨에 흘러가길


수많은 사람 중 한명일뿐인데

하나 잃었을 뿐인데

세상이 비틀대고 아무 일도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죠

내가 살아온 모든 행복을 더해도

우리의 짧은 날만 못하죠

어떻게 잊을까요 어떻게 견뎌낼까요

나는 기도해요 사랑이 우스운 나이까지

단숨에 흘러가길


바라만 봐도 좋았던 나였는데

욕심이 자라나 이렇게 벌을 받나요

보낸다는 건 내가 가졌던 거겠죠

한동안 내 것이던 그대죠

그렇게 잊을게요 그렇게 견뎌낼게요

보내고 보내도 헤어지고 다시 헤어져도

나는 또 그대겠죠


https://youtu.be/eZ5iQIkpFKA?si=NkexuOC3UHTiF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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