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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 Feb 20. 2021

영하 10도, 드라이기를 꺼내세요.

올 겨울, 보일러 온수관이 4번째 얼어붙었다. 

우리 집은 1층과 2층 보일러가 각각 집 양쪽 실외에 설치돼 있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기 전, 당근마켓에서 못 쓰는 이불을 무료로 받아다가 보일러함 안쪽에 꽉꽉 채워 넣었다. 일찍이 부동산 사장님이 '온수를 틀어놓고 자라'고 조언해줬지만 와 닿지 않아(!) 신경 쓰지 않고 지냈다. 그러다 뉴스에서 '올 겨울 첫 한파가 온다'고 한 지난 어느 날, 온수관이 처음으로 얼어붙었다. 


이를 어째야 하나 싶어 일단 부동산 사장님을 통해 동네 보일러 수리 업체를 소개받았다. (그렇다. 단독주택에 처음 살기 시작했다면 동네를 휘어잡고 있는 부동산 사장님과 계속 가깝게 지내야 한다.) 온수가 안 나온다는 세상 다급한 요청에 보일러 사장님은 '직접 녹여보라'고 천천히 답하셨다. (그렇다. 보일러 사장님은 다 알고 계셨던 거다.) 일단 출장을 나가면 비용이 드니 드라이기를 이용해 직접 해결해보란 거였다. 


'드라이기를 밖으로 연결하려면 전기는 어디로 어떻게 연결해야 하지?'가 일차 관문이었다. 보일러함 가까운 곳 창문이 방충망으로 막혀 있었다. 온갖 창문을 다 열어보고 해결책이 안 보이자 네이버에 '전기 연장선'을 검색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보일러함 안쪽에서 콘센트를 발견했다. 한숨 돌리며 드라이기를 연결하자 이번에는 대체 어디를 어떻게 녹여야 하는 건지 감이 안 잡혔다. 여기저기 살펴봤지만 파이프는 모두 단열재로 꼼꼼하게 감싸져 있었고 특별히 언 것처럼 보이는 지점도 없었다. 보일러 업체에 전화를 돌려보고, 유튜브로 검색해봤지만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의심쩍은 채 보일러 아래쪽을 드라이기로 계속 쐐 주었다. 


보일러야 보일러야 이제 그만 온수를 풀어주렴. 손이 시리단다.


체감온도가 영하 15도까지 떨어진 날이었다. 30분 넘게 칼바람을 맞고 서 있자니 눈물 콧물이 다 흘렀다. '처음부터 더 따뜻하게 입고 나왔어야 했어'라고 계속 후회하면서도 대체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어 그냥 그렇게  덜덜 떨며 드라이기를 들고 서 있었다. 과연 지금 드라이기에서 따뜻한 바람이 계속 나오고 있는 건 맞는 건지조차 의심스러운 순간. '드르릉' 자동차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나면서 2층 화장실에서 다시 온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남편과 둘이 얼싸안고 좋아했다. "우리가 해냈어! 우리가 온수를 뚫었어!!!"


한 번 일을 치르고 난 뒤, 날씨에 민감해졌다. 밤사이 영하 5도 이하로 떨어진다는 날이면 욕조에 똑똑 물이 떨어지도록 온수를 틀어놨다. 욕조 가득 받아진 물은 아까워서 청소할 때나 변기 내릴 때, 화분 물 줄 때 등에 썼다. 단독주택에서 처음 맞은 겨울인데 하필 그 겨울이 오죽이 추웠다. 이번 달에만 최저기온이 영하 5도 이하로 떨어진 게 10번, 지난달에는 20번이 넘었다. 그것도 서울 기준. 경기도인 이곳은 서울보다 확실히 기온이 1, 2도 가까이 더 낮았다. 한 번 호되게 당했으니 신경 쓴다고 썼지만 그 뒤로도 보일러 배관은 3번 더 얼어붙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싶어 물을 너무 찔끔 틀어놨던 어느 날. '오늘은 괜찮겠지' 하고 온수를 틀어놓지 않고 잤던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안 틀어놓은 어느 날. 보일러 온수관이 얼어붙었다.


이번 주, 올 겨울 들어 4번째 온수관이 얼어붙었다. 봄이 다 와간다 생각해 긴장감(!)을 늦춘 탓이었다. 


"또 얼었네. 뜨거운 물 안 나와."

"그래? 지금 녹일래?"

"좀 있다 하지 뭐."

"오케이~"


아침에 눈 떠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우리의 반응은, 지난 4차례에 걸쳐 한층 온화해졌다. 남편은 두툼한 잠바를 입고 한 손에는 따뜻한 커피를, 한 손에는 헤어 드라이기를 들고 보일러함으로 간다. 넷플릭스를 보며 목표 지점을 향해 드라이기를 계속 돌려주는 사이, 나는 2층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후드득' 온수가 나오기 시작할 때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뚫렸습니까아!"

"터졌습니다아!!!" 


낄낄거리며 장난치는 이 여유는, 보일러 온수관이 4번째 얼어붙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어쩔 줄 몰라하던 우리는 이제 개그 소재로 삼거나 밥 먹으면 양치하듯 그저 평범한 소일거리처럼 받아들이게 됐다. 가장 재미있는 소재는 역시 처음 온수관이 얼었을 때 발을 동동거리며 어쩔 줄 몰라하던 '초짜 단독주택러 부부' 스토리다. 드라이기를 챙기며 남편과 '이번 겨울, 마지막이겠지?'라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래. 5번은... 좀 그렇다. 이번이 마지막 이야깃거리이길. 




+ '언젠가는 땅을 밟고 살겠다'고 다짐하던 30대 맞벌이 부부가 덜커덕 단독주택 전세를 계약했습니다.

+ 단독주택 탐구생활 이야기 <마당 있는 집에 살기로 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house-withay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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