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동네에 처음으로 눈이 소복이 쌓였던 날. 하늘이 무겁다 싶더니 곧 골목마다 눈이 두텁게 내려앉았다. 발자국 하나 없는 포근포근한 눈밭이 두 눈을 환하게 밝혔다. 오가는 사람이 적은 동네다 보니 눈밭이 쉽게 더럽혀지지 않았다. 빨리 나가 눈을 밟아보고 싶어서 조바심이 났다. 하원 중인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창고를 뒤져 타포린 가방 하나를 찾아냈다. 포대자루랑 제일 비슷할 것 같았다. 뀨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단단히 입혀 밖으로 나갔다. 다른 세상인 듯 변해버린 동네 모습에 나도 아이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시'와 '마을'을 잇는 육교 자전거길에서는 벌써 한 팀이 썰매를 타고 있었다. (뀨는 우리 집이 있는 단독주택단지를 '마을'로, 건너편 아파트 단지를 '도시'로 부른다.) 어설픈 포대 썰매가 잘 미끄러지지도 않았지만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지. 뀨의 손 끝이 빨갛게 얼어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됐을 때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의 붉어진 볼이 한동안 가라앉지 않을 만큼 신나게 놀았다.
지난해 단독주택에서 처음 맞이한 여름, 기록적인 장마가 이어지더니 이어진 겨울에는 눈이 참 자주, 많이 내렸다. 밤사이 눈이 많이 쌓인 날은 눈을 뜨자마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평소보다 하늘이 어둡고 무거운데 공기는 고요하고 차분한 느낌. '혹시' 싶어 창밖을 내다보면 세상이 온통- 하얗다.
"뀨야뀨야, 일어나 봐. 밤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엄마가 선물을 준비했어!"
잠이 덜 깬 아이에게 마치 내가 준비해놓은 듯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 눈이 동그레 지는 그 순간이 참 좋다.
무엇보다, 코로나19로 몇 주씩 등원도 못하고 집에 갇힌 듯 있던 때에 눈이 내리면, 하늘이 주는 선물인 듯싶었다. '힘들지? 잠깐 잊고 신나게 놀아!'라며 위로하는 듯. 뀨 핑계로 나가서는 뀨보다 더 신나게 놀았다. 동네 언덕에서 눈썰매를 끌며 만난 이웃들 표정을 보니 다들 비슷한 것 같았다. 분명 웃고 있었다. 모두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집 안에서 눈 내리는 풍경을 오롯이 감상하는 것 또한 큰 기쁨이었다. 살던 아파트도, 일하던 사무실도 7층이었다. 높은 곳에서 눈이 떨어지는 모습도 참 곱지만 땅에 발을 딛고 서 그 디딘 땅 위로 눈이 쌓이는 걸 보는 건 느낌이 달랐다. 나와 눈높이를 같이 하는 나무들 위로 눈이 차분차분 쌓여나갔다. 우리 집은 가을 풍경이 참 좋다 생각했는데. 아. 겨울 눈 오는 풍경도 참 좋구나. 낮에 온 마을이 눈으로 뒤덮인 모습을 보는 것도 참 좋은데 밤이 돼 마당에 눈이 가만가만 쌓이는 순간도 참 좋구나. 이를 어쩐다.
땅에 발을 딛고 서 눈이 쌓여가는 모습을 보는 매력. 단독주택이 주는 즐거움이다.
몇 차례 폭설로 단독주택에서 겨울을 나는 요령도 익히게 됐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주차장에 나가 차에 쌓인 눈을 뭉쳐가며 뀨와 신나게 놀고는 그냥 들어왔다. 그런데 다음날 나가보니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 차에 쌓인 눈이 우리의 눈싸움으로 어설프게 녹았다 밤사이 꽁꽁 얼어붙어 버린 거였다. '쩍'하는 소리와 함께 겨우 차 문을 열었다. 단독주택에는 지하주차장이 없는 데다, 우리 집 주자장은 집 그림자에 가려있다 보니 눈이 쉽게 얼고 며칠씩 녹지 않았다. 잘 살펴보니 이웃 어르신들은 눈이 그치자마다 나와 차에 있는 눈부터 다 털어내셨다. 한 번 얼어붙으면 녹이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니 폭신한 상태일 때 눈부터 쓸어내려야 하는 거였다. 꼭 이렇게, 한 번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생긴다. 그 뒤로 우리도 기온이 떨어지면 차량 블랙박스 전원을 꺼두고, 눈이 내리면 차량 커버부터 덮어뒀다.
집 입구에 빨간 눈썰매를 세워뒀다. 이제 우리 동네에서 제일 재밌는 눈썰매 명소도 알게 됐다. 그렇게 하고 나니 다른 집 마당 곳곳에 놓인 빨간 눈썰매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겨울, 다들 집 앞 눈을 쓸어내야 하고 찬바람 맞으며 차가 얼어붙기 전 눈을 치워야 했지만, 그래도 눈이 오면 씨익 웃으며 썰매를 끌고 나갔겠지. 썰매는 며칠 더 뒀다가 창고에 넣어야겠다. 혹시.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