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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니아니 May 26. 2022

#29 자연의 풍요로움 속에 자라는 아이들

대안학교 10년차 엄마의 리얼체험기


학교가 있는 산꼭대기 마을에서는 날씨가 맑은날 밤이면 별들이 무리지어 반짝이는 하늘을 언제든 볼 수 있습니다. 진청색 밤하늘에 보석처럼 박혀 빛나는 별들 사이로 금방이라도 쏟아내려올 듯 흐르는 은하수와 어스름한 저녁 무렵 산등성이를 물들이며 시시각각 변하는 노을 빛은 마을 전체를 하나의 갤러리로 만들어 주는 풍경들입니다. 사시사철 계절을 먼저 알려주는 들꽃들과 바람의 향기 가득한 마을길은 아침 저녁 아이들 등하굣길의 기분 좋은 그림이 되어주고 낮은 언덕배기 초록빛 이파리 사이로 붉은 콩처럼 알알히 박힌 산딸기와 마당 넓은 집 울타리에 탐스러운 과실수들은 이따금 아이들의 간식거리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일부러 가꾸거나 꾸미지 않아도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마을과 학교를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들입니다. 이따금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기 위해 마을에 가는 날 운이 좋으면 은하수 흐르는 밤하늘을 구경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주 보는 광경이었겠지만 저는 그런 날이면 특별한 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으로 한참동안 흐르는 빛줄기를 지켜보다가 산을 내려오곤 했습니다. 둘째 아이가 대안학교에 입학한 첫해 5학년의 국어시간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선생님은 국어 교과서 대신 박완서님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아이들 각자에게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말 국어사전과 노트도 함께 준비했습니다.


아이들은 한 학기 동안 국어시간마다 이 소설책을 가지고 ‘천천히 읽기 학습slow reading’을 했습니다. 책 속에 우리말 낱말 뜻을 찾아 노트에 기록하기도 하고 천천히 낭독하기도 하며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발표했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마을 어귀를 돌아 싱아책을 손에 들고 자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각종 들풀들과 나무뿌리를 캤습니다. 풀잎을 뜯고 먹어보는 아이도 있었고, 땅에 떨어진 밤을 줍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돌멩이를 주워 괜히 자리를 옮겨 놓기도 하고 여린 솔잎을 따서 오물거리기도 했습니다. 노란색 꽃을 피워낸 들풀을 보고 “선생님, 이게 싱아에요?” 라고 천진하게 묻기도 합니다. 5학년 아이들이 숲에서 마냥 노는 것 처럼 보여도 국어시간에 책에서 읽고 배운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유독 풀피리를 잘 부는 아이에게 다른 아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풀피리 부는 방법을 배우려고 아이들은 저마다 아카시아 이파리를 뜯어 입에 물고 숨을 뿜어내지만 생각처럼 소리가 잘 나지는 않습니다.  자연은 이렇게 호기심과 배움의 기쁨으로 들뜬 아이들에게 더없이 훌륭한 배움터가 되어 주었습니다. 몇 차례 바람새는 소리만 내던 아이들이 어느새 “삐~”하고 예쁜 풀피리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아카시아 향기가 아이들 입속에 가득 퍼졌고 아이들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 퍼졌습니다. 교실로 돌아오는 길에는 오디나 보리수 같은 나무 열매도 따 먹기도 했습니다. 한 학기 동안 돌도 나르고 나뭇가지로 땅도 파고 풀피리 부는 법도 배우면서 싱아책을 꼼꼼히 다 읽었습니다.


아이가 집으로 가져온 책을 보니 연필로 밑줄 그은 곳이 여러 군데 있었습니다. 사전으로 낱말을 찾아 책 귀퉁이에 적어 놓은 글씨가 옹기종기 귀여웠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어느 구절에는 밑줄이 더 진하게 새겨있고 책모퉁이가 접혀 있었습니다. 아이가 특별히 기억하고 싶었다거나 자신의 마음과 관련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즐거운 학교 생활을 하고 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다시 학교가 있고 친구들이 모이는 산골 마을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기만 합니다. 길게만 느껴지던 방학이 끝나갈 무렵 담임선생님이 밴드에 아이들이 기뻐할 만한 소식을 올려주셨습니다. “선생님 집에서 하는 파자마파티” 소식입니다. 반아이의 흥분된 고함소리가 멀리서도 들리는 듯 했습니다. 마을에 있는 선생님댁에서 파자마 파티로 시작하는 개학을 위해 며칠 전부터 짐을 싸는 아이의 표정이 어느때보다 진심으로 느껴졌습니다.


선생님 댁은 학교에서 언덕길을 따라 조금 걸어내려가는 곳 마을 입구 쪽에 있습니다. 5학년 아이들은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고 마을에서 홈스테이를 했습니다. 마을에 30여 채의 학교 선생님들의 집들이 있었고 선생님들은 아이들 서너명씩을 각 가정에서 돌봐주셨습니다. 마을 길을 돌아서는 길목마다 띄엄띄엄 있는 주택들은 모양도 가지각색입니다. 언덕 위의 집, 마당이 넓은 집, 울타리에 장미꽃이 많은 집, 과실수에 탐스러운 열매들이 있는 집, 강아지가 지키고 있는 집, 창문이 유난히 넓은 집, 집들의 모양은 제각각 이지만 마을과 어우러진 모양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이렇게 예쁜 마을이 산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차로 좁은 산길을 올라가야 비로소 눈앞에 마을 풍경이 펼쳐집니다. 어떤 부모는 이 마을의 풍경에 반해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학교 앞에는 낮은 동산이 있고 봄이되면 진달래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어납니다. 초여름에는 마을 전체가 아카시아 향기로 가득하고 꽃향기는 바람을 타고 아이들의 교실안까지 들어와 천연 디퓨저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5학년 아이들은 낮에 잘 놀다가도 밤이 되면 엄마 생각이 나기도 했습니다. 이따금 훌쩍이며 우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5학년 담임 선생님은 엄마 처럼 우는 아이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주셨습니다. 울다가 잠든 아이는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학교로 달려갑니다. 주말에 집에 와서도 빨리 학교 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두번째 해인 6학년이 되었습니다. 국어시간에 선생님과 아이들은 명자꽃과 쑥잎, 진달래와 개나리를 바구니 가득 따왔습니다. 국어 교과서에 나온 꽃지짐(화전)을 선생님 댁 마당에서 만들어 먹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빚어주신 하얀색 화전 반죽위에 마을길에서 따온 꽃잎을 예쁘게 올렸습니다. 한 아이씩 차례로 후라이팬에 자기가 만든 꽃지짐(화전)을 올렸습니다. 숟가락 두개로 조심스럽게 동그란 반죽모양을 만들고 올려진 꽃잎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정성을 다하는 아이들의 못습이 영상과 사진으로 담겨져 학부모밴드에 올라왔습니다. 꽃잎이 떨어질새라 숨을 죽이며 뒤집개로 뒤집고 앞뒤로 노릇하게 구워진 화전이 큰 접시위에 가득 올려졌습니다.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모두가 화전 만들기에 집중하는 아이들이 표정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습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화전을 사진과 지식으로 배우는 것과 달리 직접 진달래꽃을 따다가 친구들과 함께 화전을 만들어본 아이들의 경험은 생동감 있는 배움 그 자체입니다. 6학년 아이들이 만든 예쁘고 고운 빛갈의 화전은 먹기에도 아까울 만큼 아이들 각자의 소중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하얗고 뽀얀 반죽에 분홍색 진달래 꽃이 다소곳이 내려앉았는데 그 밑에 초록색 쑥잎이 화려함을 한층 빛내주는 듯 했습니다. 진분홍빛 진달래가 있는가하면 노란색 개나리꽃잎과 빨간 명자꽃 화전도 있습니다. 남은 반죽은 넓게 펴서 빈대떡처럼 부쳐서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자연을 마음껏 즐기며 배우는 아이들의 표정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봄내음 가득한 화전의 추억을 우리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꽃처럼 예쁜 초등학생 아이들이 만든 꽃지짐을 만들어 먹는 모습에 부모들은 그저 감동할 뿐입니다. 진달래꽃 한바구니 가득했던 그날의 기억들이 앞으로의 아이들의 삶에 풍요로운 감성과 배움의 기쁨을 전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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