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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찾기 게임

by 한상영변호사 Aug 18. 2020

진실 찾기 게임


민족문제를 다루는 모 단체의 어느 지역 지부에서 일제 때 친일활동을 했던 유명인사에 대해 단죄비를 세우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의 침략을 옹호한 당시 저명 인물의 친일활동을 단죄비에 낱낱이 기록하여 후대에 역사의 진실을 남기려는 취지라고 하였다. 100년의 세월이 흘러도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은 보석과 같다. 세월이 흘러도 그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진실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보존해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숨겨진 진실은 진실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끝까지 파헤쳐 세상에 알린다. 수많은 어린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사고의 진실이 중요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세월호의 진실은 어린 생명과 맞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변호사 업무는 어떻게 보면 사건에서 진실을 찾고 그 진실을 해당 법에 알맞게 적용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형사 사건에서는 절도, 강도처럼 범죄 혐의의 사실 여부가 중요하다. 그러나 민사 사건에서는 원고, 피고가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법리 해석과 적용이 더 문제가 되었다. 나도 그 부분이 더 재미있었다. 그것이 일반인이 할 수 없는 전문가의 고유 영역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민사 사건에서 간혹 진실 여부가 문제가 되는 사건이 몇 개 있었다. 


부산지방법원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배당이의 사건을 수임하게 되었다. 배당이란 쉽게 말해서 채무자의 재산을 경매에 붙여 들어온 돈을 채권자들에게 분배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가짜 채권자들이 나타나서 배당금을 분배받으려고도 한다. 그런 경우에 정당한 채권자가 가짜 채권자를 찾아내어 배당받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소송을 ‘배당이의’ 소송이라고 한다.


나의 고객은 채무자에게 돈을 빌려 주고 채무자의 아파트를 담보로 잡았다. 근저당권을 설정받은 것이다. 결국 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자 아파트를 임의경매에 붙였다. 근저당이 최선순위인 줄 알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임차인이 등장하였다. 그는 근저당보다 순위가 앞서서 최선순위를 보장받는 소액임차인이라며 배당금을 자기에게 먼저 달라고 청구했다. 그 사람 때문에 고객은 갑자기 배당금이 모자라 손해를 보게 될 상황에 처하였다. 


내 고객은 그 사람을 의심하였다. 채무자와 짜고서 허위로 임대계약을 만들어 가짜로 소액 임차인 행세를 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배당사건에서 이런 일은 매우 흔하게 있었다. 이제 문제는 그 사람이 가짜 소액 임차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밝히느냐의 과정만 남아 있었다. 그 사람과 일종의 진실 게임을 해야 하는 것이다.


멀리 떨어진 부산에 있는 아파트에서 그가 경매 당시에 실제 거주했던 임차인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조금은 황당하고 망막한 사건이었다. 상대방은 임대차 계약서와 보증금 영수증, 주민등록 전입신고 자료 등 관련 서류를 다 증거로 법원에 제출하였다. 원래 자기가 살던 곳이라 잘 알던 지역의 아파트를 부동산 중개사 없이 직거래로 임차 계약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제출한 서류들은 따지고 보면 채무자인 임대인이 상대방과 짜고서 그에게 부탁하여 형식상 만들어 놓은 것들일 수 있었다. 배당이의 소송을 할 즈음에는 경매 개시 당시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러 내 쪽에서 증거 자료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의 아파트 출입구 CCTV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보존기간이 경과하여 지워진지 이미 오래였다. 유리하게 증언해 줄 증인을 찾기도 어려웠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상대방은 자신이 소액 임차인으로 실제 거주하였다며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변호사 없이 본인이 직접 변론을 하였다. 중간에서 재판을 하는 판사도 직접 임대차 현장을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내 쪽에서 특별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는 이상 원고 패소 판결을 할 수밖에 없었다.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재판을 위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열차를 타고 가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까? 관리비 납부에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아파트에 직접 납부하는 관리비는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가스, 전기요금 납부에 약간 의심이 들었다. 고민 끝에 가스회사와 전기회사에 가스와 전기의 사용내역과 요금 납부영수증을 보내달라고 법원에 신청하였다. 법원에 문서송부촉탁 신청을 한 것이다. 


만약 상대방이 경매 전에 그 아파트에 실제 거주하였다면 가스와 전기를 사용하였을 것이었다. 특히 임대차 기간에 추운 겨울철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계절 특성상 겨울에 전기와 가스 사용 없이 겨울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1개월 정도 지나서 전기와 가스 사용내역서와 요금 납부내역서가 법원에 도착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12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약 4개월의 겨울철 기간에 전기, 가스 사용내역과 요금 납부 내역이 거의 제로였다. 


재판장은 원고 승소 판결을 선고하였다. 상대방은 1심 판결에 더 이상 불복하지 않아 소송이 1심으로 간단히 종결되었다. 가짜 임차인이라는 진실이 밝혀진 셈이었다.


진실이 문제 된 또 하나의 민사 사건은 인테리어 공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 사건에서는 상대방이 변호사를 선임하였는데, 그 변호사가 적극적으로 허위 주장을 해서 문제가 복잡해지고 재판이 길어졌다. 


사건은 간단한 것이었다. 내 고객은 의사였는데 자신의 건물에서 병원을 운영하였다. 병원 어느 층에 인테리어가 필요했다. 인테리어 업자와 계약을 해서 공사를 다 맡겼다. 공사업자는 공사 중에 수도시설을 원래 있던 곳에서 다른 부분으로 이전공사도 했다. 그런데 공사가 다 끝나고 약 6개월쯤 지나서 문제가 터졌다.


공사업자가 이전공사를 한 수도관 밸브가 이른 새벽에 완전히 빠졌다. 공사업자가 수도밸브 잠금장치를 제대로 잠가 놓지 않고 공사를 마무리한 잘못이었다. 물이 새벽 내내 세어 나와 그 층뿐만 아니라 아래층까지 침수가 되었다. 아래층은 고객이 임대를 놓아 의류업체가 옷 등을 저장하고 있었는데 침수사고로 인해 거의 다 못쓰게 되었다. 


의류업체는 고객을 상대로 수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고객은 인테리어 공사업자를 상대로 구상권을 행사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두 개의 사건을 모두 수임하게 되었다. 먼저 의류업체의 손해배상 청구액이 부당하게 과다한 부분을 방어하여 약 50%를 감축하는 것으로 판결이 났다. 


곧바로 고객은 그 금액을 의류업체에게 배상해 주었다. 이제 고객은 수도밸브 공사를 잘못한 공사업체로부터 동일한 금액을 배상받는 것으로 사건은 간단하게 종결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인테리어 공사업체에 대한 재판이 그렇게 간단히 진행되지 않았다. 공사업체에 대한 소송은 공사 하자에 의해 침수 사고를 일으킨 불법행위를 근거로 청구한 것이었다. 불법행위에 대한 입증책임은 소송을 제기한 원고가 부담하여야 한다. 일단 원고가 입증해야 할 가장 기초적이고 간단한 사실이 누가 공사를 했느냐이다. 


공사를 실제로 누가 했느냐에 대해서 다툼이 있을 것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상대방 변호사는 고객이 주장하는 피고가 인테리어 공사를 직접 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는 것이었다. 고객은 공사비를 공사업자가 그의 지인 앞으로 발급해 달라고 부탁하여 그렇게 해 주었는데, 상대방 변호사는 그 지인이 실제로 공사를 한 것이라고 우겼다. 피고를 잘못 지정하였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그 지인은 재산도 거의 없는 사람이라서 피고가 되어 보았자 고객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


황당한 변론이었다. 판사 앞에서 두 명의 변호사 중의 1명은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셈이었다. 그것도 가장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판사는 중간에서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재판을 진행했다. 고객에게 다시 실제 공사를 누가 했는지 재확인해 보았다. 전혀 이상이 없었다. 피고는 재판정에 출석 한번 하지도 않고 변호사만 보내었다. 


이런 재판은 처음이었다. 별 수 없이 문제의 공사업자를 고객에게 소개하기도 했고, 고객에게 의료기를 납품하면서 공사현장을 목격했던 의료기 납품업자를 증인으로 신청하여 증인신문까지 진행해야 했다. 그러느라 재판을 시작한 지가 어느새 1년 정도가 지나게 되었다.


증인신문할 때는 재판정에 내 고객도 처음으로 직접 출석하도록 했다. 역시 증인신문을 통해 실제 공사를 한 자가 누구인지 간단히 확인되었다. 어차피 밝혀질 진실을 왜 그렇게 극구 부정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간 끌기 작전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1년 동안 재판정에서 거짓말을 한 상대방 변호사의 인격마저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변호사 업무를 하면서 민사 사건에서 밝혀만 한 진실들은 대부분 단순한 것들이다. 단순한 사실에 대해 재판관 앞에서 원고와 피고가 서로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는 일종의 진실 게임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재판에서 승소 패소 여부가 갈라지기는 하지만 진실 여부에 대해 서로가 두려움으로까지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역사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은 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수십 년, 수백 년의 

세월과 수많은 사람들의 삶고 죽음이 그 속에 들어 있다. 위안부, 독도 문제도 그렇다. 역사의 진실은 두려움의 존재이다. 그 진실을 캐고 지키려는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거창하게 역사까지는 아니라도 나 자신은 어떤가? 내 영혼의 심판대가 있다면 그 앞에서 내 모습은 어떨까? 이생의 재판정에서처럼 일단 우겨 보고 재판관이 간파하지 못하고 지나치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세상의 법으로는 걸러지지 않은  수많은 나의 허물들이 파노라마처럼 내 눈 앞에 지나간다. 재판정에서 진실을 숨기고 허위를 외쳐대던 사람들과 다를 바가 뭐가 있을까? 내 무릎에 힘이 쭉 빠지고 몸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세상 속에서 분주하게 살고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는 그 심판대가 내게 보이지 않았다. IMF로 직장을 잃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단절하였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다. 5년 정도를 가족 하고만 지내며 사법시험만 준비했다. 그렇게 내 안에 잠잠할 때 갑자기 그 심판대가 내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아! 내가 그 심판대 앞에 선다면 어떻게 될까? 그 심판대에서 나를 변호해 줄 이는 없는 것인가?


요즘은 SNS가 발달하여 수십 년이 지난 과거의 죄와 허물들이 SNS를 통해 손쉽게 온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퍼진다. 그 심판대가 마치 이생 에로 내려온 느낌이다. 과연 영혼의 심판대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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