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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츠네 Dec 30. 2021

달콤 씁쓸한 크리스마스

솔로 두 남자의 크리스마스 약속

메리 크리스마스, 즐거운(?) 성탄절.

애석하게도 쓸쓸함이 가장 선명해지는 날이 찾아왔다. 음원 사이트 차트는 캐럴 송으로 가득했고, 의식하지 않아도 크리스마스임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 H와 나는 오늘이 쓸쓸하게 흘러가지 않도록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저녁 7시, 우리는 웰컴 드링크를 무료로 준다는 한 클럽 펍에서 만나기로 했다. 뜨거운 열기의 파도 속에 그저 몸을 던져 보고 싶었다. 부목처럼 신나게 휩쓸려 다니다 보면 오늘이 성탄절인 것마저 잊으며 홀로라는 고독을 흘려보낼 수 있지 않을까.


H에게서 카톡이 왔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며 펍에 자리를 잡아 놓겠다고 했다. 지하철에 내리자마자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개찰구를 나섰다. 지하철 역사에는 구세군 종소리가 딸랑딸랑 울려 퍼지고 있었다.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 주입. 어디서나 울려 퍼지는 캐럴과 상점에 걸려 있는 트리는 강렬하게 크리스마스임을 알려 온다. 어릴 적에는 크리스마스를 가장 좋아했다. 밤톨 머리의 어린 시절엔 한 해중 가장 설레는 날이 크리스마스였다. 아침이면 산타가 다녀간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맡에 소복이 놓인 산타 양말 속에는 건담과 아톰 같은 장난감이 들어 있었다. 눈발이 휘몰아치는 툰드라에서 밤새 루돌프를 이끌고 이 먼 곳으로 산타가 다녀간 걸까. 알고 있었다. 산타는 부모님이라는 것을. 거짓된 판타지지만 그 속에서 마음의 풍요를 가장 넉넉히 채우던 날이었다. 구세군 종소리에 빠져 들다 보니 나도 모르게 지난날의 크리스마스를 곱씹고 있었다. 그때의 크리스마스와 지금의 크리스마스는..


딴생각에 잠길 때면 발걸음도 빨라지나 보다. 어느덧 펍 앞에 다다랐고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강렬한 사운드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치 사람들의 열기로 폭발할 것만 같은 분위기. 그러나 그에 걸맞지 않게 휑한 인파는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개성 넘치는 몇몇은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DJ의 선곡에 그저 일렁이는 파도가 된 듯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혼밥보다 난이도가 수십배네.'

구석 모서리 테이블에 자리 잡은 H가 보였다. 그는 축구장에서 야구 유니폼을 입은 것처럼 어색해 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텔레파시라도 한 듯 서로 말했다.

"여기는 아닌 것 같다. 우리 방식대로 보내자."

발도장 찍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자며 짐을 챙기고 서둘러 나왔다.


겨울은 방어 철이다. 역시 공격보다는 방어라는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인근의 작은 횟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두 자리가 비어 있어 방어 2인분에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소주잔을 부딪치며 입속으로 한 번에 털어 넣고 방어 한 점을 씹었다. 두툼한 게 식감이 퍽 좋았다. 들이켜는 소주는 생선의 잡내를 말끔히 지워 주었다. 이거지. 황홀함을 삼음절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렇게 표현하겠다. 이거지. 누군가는 서로의 손을 꼭 쥐며 거리를 지나갈 때 우리는 각자의 잔을 꼭 쥐며 연거푸 부딪혔다. 누군가는 술이 달다고 했다. 오늘 마시는 술은 달지 않았다. 오히려 약처럼 써서 목구멍에 넘길 때마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직장, 사랑, 이별 같은 쓰디쓴 이야기들만 늘여 놓아서 그런 것일까. 약도 쓰면 몸에 좋다는데 아주 쓴 이 이야기들도 몸에 약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H는 최근 이별을 했다. 긴 연애만 해오던 그가 이번에는 짧은 만남으로 헤어졌다고 했다. 찌푸려진 그의 미간은 소주 때문일까 그녀와의 추억 때문일까. 각자의 인연을 주마등처럼 떠올리며 움켜 쥔 소주잔을 한동안 바라봤다.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는 게 사랑인 것 같아 슬프다. 사랑은 낭만이라는데 결혼은 현실이고 결혼을 위해선 사랑을 키워나가야 하는데 그 둘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낭만으로만 아름다운 사랑을 하던 시절도 있었지. 그랬군. 그래도 혼자 쓸쓸하게 늙어가지는 말자. 오늘을 도약으로 삼자. 내년에는 더블데이트를 하기로 다시금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제는 산타도 없고 머리맡에 놓인 산타 양말도 없다. 여전히 어디선가는 체온을 뒤섞으며 더 따뜻해지고 어디선가는 선물을 나누며 더 풍요로워질 테다. 크리스마스는 실재하는 모습으로 어디선가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겠지. 창 밖에는 오지 않는 눈이 내리고 있다.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눈이다. 누군가의 발자국이 움푹 파여 있다. 각자의 발자국일까 나란히 곁을 걷는 두 사람의 발자국일까. 두 사람의 발자국이라면 사랑하는 사람과 걸은 자국들이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실재하는 우리의 자국들로 남았으면 좋겠다. 크리스마스의 어두운 밤은 짙어져 가고 초록 소주병은 계속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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