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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나 Jun 13. 2021

<내 안의 ‘진짜’ 선생님>

내 기억 속엔 내 인생을 수렁에서 건져준 ‘진짜’ 선생님이 계신다.


중학생 시절, 나는 인생 최대의 암흑기를 지나고 있었다.

집에 있던 모든 돈을 들고 해외로 도망간 엄마로 인해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고,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아빠도 술에 의존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로 흔들리던 그 시절, 나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일기장이었다.


나의 힘든 사정을 주변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 사정을 알게 된 주변 어른들의 동정심과 측은함에 나오는 손길들은 사춘기 어린 마음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더욱더 마음을 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혼자 털어낼 수 있는 일기장에 이름을 붙여 친구에게 편지 쓰듯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 새로운 국어 선생님이 부임해오셨다. 깡마른 몸에 큰 눈을 가지고 국어에 진심이셨던 선생님.

그 선생님은 우리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일기를 써서 숙제로 제출할 것


나는 쓰던 일기장을 바꾸지 않았고, 내 안에 깊은 이야기를 쓰는 것도 그만두지 않았다. 그냥 하던 대로 써서 제출을 했다. 선생님이 담당을 하고 있는 100명이 넘는 아이들의 모든 일기장을 들여다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냥 도장 하나 꾹 찍어주고 돌려주실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선생님은 내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일기에 정성스레 코멘트를 달아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많이 힘들었겠구나를 넘어서 자신의 경험을 덧붙여 페이지의 남은 부분을 꽉 채워 주셨다.

처음엔 부담스러웠는데, 시간이 가면서 선생님과 펜팔 친구가 되기 시작했다.

선생님과 개인적으로 얼굴을 보며 면담을 하거나, 발표를 한다고 손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과 깊은 유대감이 생겼었다.

유일한 상담창구였고, 소통의 공간이었으니까.


한 번은 돌려받는 일기장이 두툼해서 뭔가 하고 열어보니,

슬픈 감정을 써 내려간 곳 옆에 ‘좋은 생각’이라는 작은 책 한 권이 끼워져 있었다.

월간 잡지였던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의 세상 사는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떠나보낸 사람을 그리워하는 이야기, 아픈 아이를 슬퍼하는 이야기, 세상을 살아가는 희로애락의 이야기가 짧은 단편으로 담담하게 적혀있었다.


그 책이 끼워져 있던 날 만큼은 코멘트가 짤막한 한 마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나에게 인생사 고난이 찾아올지라도, 함께 연대하여 이겨내는 힘이 있고, 그렇기에 아름다운 날들도 오는 거라고, 그런 말들을 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역시나 지금껏 살아보니, 좌절하고 실망하는 날들은 항상 있었지만 내 옆에서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 역시 항상 함께 있었음을 깨닫는다.


단순히 내 일기에 코멘트를 달아준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분은 업무가 끝나고도 100명이 넘는 학생들의 일기를 읽고 정성스레 답을 해주었고 그건 명백히 그분의 개인 시간을 희생한 것임을 이제야 안다.

애정 가득한 코멘트는  한 학생의 마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작은 희망을 불어넣었고,

고통 없이 죽는 법에 대해 알아보던 학생에게 한 가닥 동아줄이 되었다. 그건 한 사람의 인생을 수렁에서 빼내 준 ‘진짜’ 선생님의 위대한 일이었다.


싸이월드가 없어지면서 선생님과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겼고, 조금은 나를 돌아볼 여력이 생긴 지금에서야 선생님이 생각났지만 안타깝게도 연락할 길이 없다.


졸업 후에 다가온 스승의 날에  꽃 한번 드리지 못했던 부족한 제자, 이 이야기를 들으면 기억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애씀으로 그 제자는 커서 장교가 되고 싶었던 장래희망을 이루었고, 좋은 배우자 만나 아이도 둘이나 낳고 다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언제 한 번 라면 끓여줄 테니 오라고 하셨던 그 약속,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라면 끓여주세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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