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나 Jul 05. 2022

<운동화와 김치찌개>


아빠는 참 가부장적인 분이셨다.


일터에서 돌아오면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앉아서 자식들과 아내가 가져다주는 물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온 가장을 가족들이 따라야 하는 게 우리 집의 암묵적 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가부장적 사고는 엄마가 사라지면서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나서도 밥은 먹어야 하고 누군가는 집안일을 해야 했는데,

아들은 8살 어린아이였고 14살 딸은 서툴렀다.

게다가 아빠의 가부장적 사고와 엄마의 부재는 딸을 더욱 반항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고.


결국 아빠가 나서서 칼을 잡기 시작했지만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김치찌개 밖에 없었다.

시골 큰 집에서 주신 김장김치를 일 년 내내 찌개로 끓여먹었다.

매일 찌개를 끓여먹다 보니 맛은 점점 발전했고, 김치찌개 하나만큼은 뚝딱거리지 않고 손쉽게 끓여먹게 되었다.


6.25 시절, 미군들이 남긴 음식들을 그러모아 끓여먹던 부대찌개가 나라가 가난했던 시절의 상징적 음식이 되었다는데,

나에겐 김치찌개가 그런 음식이었다.

냉장고 안에는 항상 시어터진 김장김치밖에 없었고, 그걸로 해 먹을 수 있는 요리는 김치찌개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반찬을 하기 위해 장을 볼 시간도 없었고, 반찬을 만들더라도 보관이나 설거지에 드는 에너지는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현장일을 하는 아빠도, 청소 빨래와 동생 챙기는 일만으로도 허덕였던 나도, 어린 동생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면에서 김장김치는 1년 넘게 냉장고에 있어도 상하지 않았고, 그저 꺼내어 끓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

그 시절 우리 가족의 상황에는 그만한 음식이 없었던 것이다.


가족의 안녕을 챙겨줄 사람의 부재,

그 상징 같은 음식이었다.




평범한 중고등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또래 무리들이 입고 신는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것이다.

내가 학생 때는 스포츠 브랜드 운동화와 메이저 브랜드의 교복, 떡볶이 코트 같은 것들이 유행이었다.

떡볶이 코트는 다행히 교복 위에 꼭 입으라고 학교에서 지정을 해주어서 하나 가지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보세 운동화와 브랜드가 없는 교복이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다.

반에 엘리트-스마트-아이비 교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나 하나여서 더 그랬다.

이따금씩 반 아이들이 모여 어디 교복은 이런 점이 좋고 이런 점이 아쉽다는 등의 이야기를 할 때면 은근슬쩍 화장실로 도망가기도 했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내 옷과 신발에 아무도 관심도 없었는데, 뭘 그렇게 전전긍긍했는지.


교복은 너무 고가라서 어쩔 수 없었지만 운동화는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쪽으로는 통 관심 없던 아빠를 설득해 결국 운동화를 사러 나가게 되었다.


우리 집 형편에 브랜드 매장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고, 아울렛 단지를 찾아내어 아빠를 끌고 갔다.

웬걸, 아울렛 매장은 분명 브랜드 매장보다 훨씬 저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행에 한참 뒤처진 올드한 운동화들이 저렴하지도 않은 가격표를 붙이고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나마 가장 평범에 가까운 스타일로, 그것도 당시 유행의 축에 끼지 못했던 저렴한 프로스*스로 골라잡고는

아쉬운 마음으로 걸어 나왔는데 아빠에게 핀잔을 들었다.


무슨 운동화를 몇만 원 씩이나 주고 사냐. 이제 다시는 이런 거 없다.”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내 운동화 하나 어쩌지 못해 손을 벌리고 핀잔 듣는 내 처지가,

친구들은 다 신는 브랜드 운동화 하나 사지 못해 먼 곳까지 와서 개 중 가장 저렴한 물건을 집어 드는 부녀의 모양새가,

예쁘게 잘 신으라는 말 한마디 못 하게 만드는 우리 집의 가난까지 모두 한꺼번에 몰려와 내 자존심을 무너뜨렸다.


다시는 아빠에게 손 벌리지 않을 거야.

얼른 독립해서 나가야지. 하는 오기어린 생각들로 머리를 가득 채우며 눈물을 꾹 참았다.


자식을 낳아 키우는 지금이야, 한 푼이라도 아껴서 대출을 갚고 살고 싶은 마음과 그 마음을 자식들이 알아주기를 바랐던 아빠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당시에는 가난한 우리 집에 너무나 환멸을 느꼈더랬다.




인생은 물과 같다.

여기저기 흐르면서 넓은 바다도, 잔잔한 강도, 냄새나는 하수구도 지나간다.

14살, 그 때로부터 19년이 지나 다른 에 와 있는 지금은

가난의 상징이었던 아울렛 운동화도, 부재의 상징이었던 김치찌개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열심히 흐르다 보니 어느새 잔잔한 강 즈음 와있어서 일까.




비나의 인스타그램


이전 03화 <내 안의 ‘진짜’ 선생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