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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나 Jul 20. 2022

<태워버린 일기장>

이따금씩 한 밤중 놀이터에서 한 장씩 찢어 태웠던 일기장이 생각나곤 한다.


마음이 어둑하던 청소년 시절, 나는 그날그날 감정의 잔해를 일기장에 뿌리기로 했다.

한 권의 두꺼운 노트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사용하고 나면

정말 누군가에게 떠들었던 것 마냥 답답했던 속이 조금이나마 가라앉곤 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일기를 쓰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털어내 보고자 만든 궁여지책이 일기장이었는데.

2cm 두께의 노트 한 권을 그렇게 꽉 찬 쓰레기통으로 만들어두고나니

누군가에게 그 쓰레기들을 들킬까 노심초사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기록들이었다.

심지어 내가 다시 들춰봐도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나는 그 일기장을 들고 놀이터로 향했다.

한밤중에 놀이터 모래 구덩이를 파고 노트를 한 장 한 장 뜯어 불에 태워 묻어버렸다.






그런가 하면, 그 무렵에는 제출용 일기장도 있었다.

계약직으로 들어오신 국어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일기를 써서 제출할 것을 요구하셨기 때문이었다.

꽤 많은 반의 수업을 맡아하셨음에도 그 많은 일기장을 전부 받아 일일이 정성스러운 코멘트를 달아주시는 모습은

어린 중학생들이 보기에도 따뜻한 진심이 느껴져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즈음, 일기장에 혼자 소리치던 것에

누군가 대답을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우울한 감정들이 혼자만의 일기장을 넘어 제출용 일기장에까지 새어나가고 있었다.


몇 번 코멘트를 달아주던 선생님은 어느 날, 일기에 장문의 코멘트와 함께 <좋은생각>이라는 월간지를 끼워 넣어 돌려주셨다.


기억하기로는,


계속되는 고통은 없고,

우울한 시절은 반드시 지나간다-

시간이 흐르면 분명 지나간다.


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힘겨운 삶에도 희망과 사랑을 담아 생을 살아가는 <좋은생각> 의 이야기들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생을 저주하던 나에게 ‘나도 저 사람들과 같이 아름답게 살아내고 싶다’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한 번도 선생님과 마주 앉아 진지한 대화를 나눠본 적 없었지만

어느샌가 선생님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펜팔 친구가 되어 감정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선생님의 소식을 이제는 알지 못하지만, 덕분에 어둔 감정을 다룰 줄 모르던

사춘기 여자아이는 생을 잘 살아낼 연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군인이 되기 위해 기초군사훈련에 후보생으로 입교한 날, 여러 보급품과 함께 <수양록>이라는 노트를 보급받았다.

너덜해진 수양록


아마 정신을 수양하라는 목적으로 그런 이름을 붙여둔 것 같은데, 정신수양의 목적보다는 살아남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외부와 소통할 창구가 아무것도 없는 훈련소에서 수양록은 유일한 창구였다.


지금은 다르겠지만 훈련소에서는 TV도 라디오도 전화도 모두 차단된 상태에서

딱 죽기 직전까지, 1분 단위로 쪼개어 몸을 굴려댔다.


어딘가에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수양록이 그 유일한 창구가 되어주었다.


저녁밥을 먹고 남은 개인정비 시간에 수양록을 찢어 외부의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서 부치기도 했고

하루하루 얼마나 지옥이었는가를

적어 나열하기도 했고,

나는 대체 뭣하러 군대에 자진해서 왔는가- 따위를 적기도 했다.

부당하게 욕먹은 날의 기록


그중 제일은 가장 악독한 훈육관이 얼마나 지독하고 고약하고 비인간적이었는지에 대해 적는 것이었다.


나는 네 번의 훈련소 생활 중에 역대 훈육관 중 가장 악독하기로 유명한 정 모 훈육관님과 세 번이나 함께 했다.


어깨에 부상을 입어 팔걸이를 하고 훈련소로 복귀하던 날,

“팔 뭐야? 군장 안 메겠다고?’ 라며 성질을 부리던 분.

(덕분에 완전군장으로 남은 훈련 일정을 소화하고 1년 간 어깨를 쓰지 못했다.)

8월 뙤약볕에 완전군장(25kg의 짐가방과 전투장비)으로 이동 중 쓰러진

여자 동기의 일로 새벽에 전체 여후보생들을 불러내 얼차려를 시키던 분이었다.


물론 그분은 자신의 임무를 열정적으로 수행한 것뿐이었지만

피지배층(?)의 입장이었던 그때의 우리는 수양록에 쓸 말이 참 많았더랬다.


어느 날, 정 모 훈육관님은 느닷없이 수양록 검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하늘이 두 쪽나도 안될 일이었다.


앞 선 훈련들 중 단 한 번도 수양록을 검사한 적은 없었기에 정말 솔직하고 가감 없이 내용을 채웠던 지라

훈육관님이 보면 절대, 절대 안 될 것들이 아주 많았다(심지어 남자 친구에게 쓰다 만 편지도 있었다).


1 생활관부터 시작한 검사는 점차 다가오기 시작했고, 급기야 몇몇 동기들과 함께 훈육관이 보면 안 될 법한 내용들이 담긴

페이지를 몰래 찢어내기 시작했다.

찢어 숨겼던 페이지들. 남자친구에게 부치려던 편지.


결국 검사는 7~8 생활관에서 멈췄고 내 수양록은 지켜졌지만

오밤중의 검사 퍼레이드로 십년감수한 덕택에 더 이상 수양록에 내 솔직함이 자리할 일은 없어졌다.





무사히 군에 입성을 하고 나서, 나는 감성적인 예쁜 무지 노트를 만나게 되었다.

일기장으로 내 방 서랍에 자리 잡은 그 노트에는 고통이 한아름 담겨있다.

일을 하기 시작하며 바빠졌고, 퇴근 후에는 쉬기에 여념이 없었던 지라 일기장을 자주 열어볼 틈은 없었다.


하지만 상사에게 욕을 한 바가지 먹은 날이나,

훈련이 너무 고되어 눈도 깜박이기 힘든 날,

손가락이 점점 굳어져 글씨를 못쓰게 될까 두려운 마음에(손발이 굳어지는 병을 앓고 있었다)

뭐라도 쓰는 연습을 해보고자 하는 날들에는

어김없이 일기장을 펴 감정을 한껏 쏟아냈다.

푸념 가득한 일기장


육아 우울증으로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욕구가 들 때도

우울을 생각하는 대신 일기장에 뱉어냈다.

사람에게 쏟아내지 못할 감정을 일기장에 쏟아내고 나면

한바탕 울고 난 것처럼 가슴이 잠잠해졌기 때문이었다.


긴 시간 일기 생활로 깨달은 것은,

고통은 마음에 지니고 있으면 병이 되지만

어딘가 전부 토해버릴 수 있다면 괜찮아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 만들어진 고통을 적는 습관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쓰는 자리를 온라인상으로 점점 옮겨오면서 그 무지 노트는 아직도 내 방 서랍에 다 채워지지 않은 채로 놓여 있다.

다 채워지지 않는 게 내 마음이 순탄하다는 뜻이니, 사실은 덜 채운 채로 서랍 속에 그대로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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