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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나 Jul 30. 2021

<제발, 건강하게만 해주세요> ep.02

내가 처음 배치받은 곳은 포천의 작은 대대급 부대였다.

위병소를 통과하면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평일에는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는 조용한 곳이었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마음이 지쳤을 때면 교회 구석의 피아노 방으로 가서 혼자서 이것저것 치며 스트레스를 풀던 습관이 아직 남아있었는지

퇴근하기 전 그곳에 들러 피아노를 치는 게 시끄러운 마음을 잠재우는데 도움이 되곤 했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내 손가락이 어디가 얼마나 마비되어가는지 볼 수 있는 기준점이 되기도 했었다.

반주의 특성상 새끼손가락을 많이 썼는데, 새끼손가락으로 건반을 점점 누를 수가 없게 되자 약지가 그 역할을 대신했고, 아예 곡 다운 곡을 칠 수 없게 되자 나중에는 피아노에 엎드려 울고 나서 퇴근하곤 했다.





사격훈련이 있던 어느 날, 간부들도 다 참여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한참을 고민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훈련을 빠질 수 있을지.


손이 아프다고 말을 했었으나, 이미 병원에 다녀온 뒤였고 다들 대충 나았겠거니- 하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일단 보고는 해야 했으니, 그 당시 부서 최고참이었던 군수과장님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과장님, 저 손이 아직.. 움직이는 게 어려워서 사격은 힘들 것 같습니다.


-뭐라는거야? 개소리하지 말고 나와.



그분 딴에는 가장 군기 들어있어야 할 신입 소위가, 자꾸만 이리 빼고 저리 빼는 모습이 고까웠을 것이다.

병원에 검사받으러, 치료받으러 뻑하면 서울로 나가니


 '하여간  요즘 애들은'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하지.

지금은 이해한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어찌나 상처 받았던지.


결국 사격장까지 갔고, 가장 힘이 남아있었던 양 손의 검지와 중지 등 손가락 세 개를 방아쇠에 끼워 넣고 격발을 했다.


사격할 때는 각각의 손 들에 역할이 있다.

왼손으로 소총을 받치고, 오른손 검지로 조심스럽게 총이 좌우로 흔들리지 않도록 방아쇠를 당기고, 나머지 오른손 손가락들은 격발 반동에 총이 흔들리지 않도록 몸 쪽으로 총을 단단히 당겨주는, 뭐 그런 것들.


그런데 양 손의 손가락을 끼워 넣어 격발을 하면 사격의 자세를 제대로 취할 수 없고, 표적에 맞추는 건 영 딴 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그때 내가 몇 발을 표적에 맞췄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한 두발 정도였던 것 같다.


전 간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망신을 당하고, 욕은 욕대로 먹고 눈물 나지 않도록 얼굴에 철판을 두른 채로 사격장을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부대의 활동에 누가 되는 걸 더 이상 버티고 앉아있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육아휴직을 했지만

일을 하지 않아도 어려움은 있었다.


남들 1분이면 갈 수 있는 아이 기저귀를, 장장 20분 가까이 기어서 도망가는 아이의 기저귀 하나 어쩌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폭발해버린 적도 있었다.

참아왔던 감정들이 폭포처럼 쏟아지며 기저귀를 내던지고는 꺼이꺼이 울어버린 것이다.


내 눈물을 처음 본 아이는 당황했는지 버둥거림을 멈추고 눈만 깜박거리며 나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젖병 뚜껑을 열지 못해 자지러지는 아이를 뒤에 두고 낑낑 거리며 발 동동 구르던 날들도,

아기띠를 메고도 등 뒤에 달린 후크를 잠글 수가 없어 두 팔로 두어 시간을 안고 버틴 적도 있었다.


그래도 남들에게 민폐 끼치는 기분은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됐기에 그걸로 만족했다.





건강은, 있을 때는 소중한 줄 모르다가 사라지면 그 빈자리가 참 크게 다가온다.


진료를 받고 집에 돌아오며 매번 울던 그 순간들이 이따금씩 생각날 때면

내 발로 걷고 내 손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지금이 눈물 나게 감사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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