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 들렀던 딸사장이 할아버지카페에 출근했습니다. 양쪽 손으로 부여 안은 사과 상자 가득, 마트에서 장을 본 물건들이 들어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살이 붙으면서 힘도 장사가 된 듯합니다. 어찌 보면 이 아비보다도 힘을 더 잘 쓰는 것 같습니다.
가게에 들어선 딸 사장은 얼굴이 벌건 채로 가쁜 숨을 색색, 몰아 쉽니다. 뭐가 그리 급했길래, 딸의 행색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끌끌 혀 차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안 봐도 비디오지요. 딱히 급한 일이 없어도 마음만 바쁘지요. 꼭 아비인 저를 닮았습니다. 성격만 닮은 것은 아니지요. 아직, 우리 딸사장이 갈래 머리 여고생이었을 때입니다. 딸아이의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우연히 저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딸아이의 친구는 저와 딸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한참을 깔깔 댔습니다. 친구가 돌아간 뒤, 딸아이가 새침한 표정으로 제 친구의 말을 전했습니다.
얘, 너 수염 기르면 꼭 느이 아부지다.
수염이 날 리 없는 젊은 여자애가 수염을 기른다는 발상이 하도 맹랑하고 우스워서 저도 한참을 웃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닮았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싶었지요.
네, 그렇습니다. 공식적으로 할아버지카페의 사장은 우리 딸입니다. 그리고 저와 우리 할머니 마담님은 우리 딸의 나이 많은 종업원인 셈이지요. 사실, 우리 가족이 맨 처음 할아버지 카페를 차릴 때만 하더라도 저는 그저 우리 딸이 이름만 빌려주는 명함 사장에 성실한 짐꾼 노릇만 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내외의 앞날은 할아버지들이 젊은 짐꾼과 여행을 하는 예능프로의 한 장면처럼 흐뭇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 부부가 그리던 것과는 아주 많이 달랐습니다.
딸 사장의 참견이며 잔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손님 없다고, 뽕짝 나오는 유튜브 크게 틀고 보는 일은 하지 말라지 않느냐? 이번에도 조명섭이냐? 아빠는 그 친구 어디가 좋아서 가게 손님 놓치는 것도 모르고 노래를 듣느냐? -이 자리를 빌려서 말하지만, 저는 정말 조명섭 군을 좋아합니다. 세상 이렇게 재간 좋은 젊은이가 어디에 또 있을까요- 그뿐 아닙니다. 앞치마는 어디에 벗어놓았느냐, 서비스 포인트를 적립한 손님의 영수증은 헷갈리지 않도록 빨리 버리라고 하지 않느냐, 그리고 아버지 나오실 때, 여름 중절모로 바꿔 쓰고 나오라 했건만, 왜 겨울 것을 그대로 쓰고 나왔느냐. 사실, 잔소리가 심하기로는 우리 마누라, 그러니까 할머니 마담님을 당해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보면 우리 딸사장이 엄마보다 한 수 위입니다.
순전히 이 아비의 생각이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수월치 않은 나이가 되도록 저 혼자 지내서 저 모양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종의 노처녀 히스테리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제 생각만 그러면 뭘 합니까. 본인은 요지부동, 영 짝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집 딸도 다른 집의 혼기 지난 자식들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맞선이나 소개팅 이야기는 입도 벙긋 못하게 하지요. 게다가 그 몹쓸 눈은 눈썹 위에 붙었는지 따지는 것도 참 많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예쁜 탤런트나 공주쯤 되는 줄 아는가 봅니다. 솔직히 저나 제 아내의 능력으로는 그런 딸을 낳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명색이 아비 되는 사람이 자식에게 하는 말인데, 우리 딸년은 무엇하나 곱게 넘어가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시시콜콜 셈하고 따지는 것은 예사이고, 안 되는 일은 핑계도 많고 이유도 많습니다. 따박따박 말대꾸도 빠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가 만든 자식이라지만, 저 또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으름장을 놓아보기도 합니다.
요 앞에 카페에서 바리스타 구한다더라.
너 자꾸 그렇게 삐딱하게 굴면, 아무개 카페에 취직하련다.
내 실력이면 대한민국 어디서도 굶어 죽지는 않을 거다.
제가 말해놓고도 문득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잘 배워놓은 바리스타 기술 하나가 늙은이를 얼마나 당당하게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말은 우습지만, 아주 빈말은 아닙니다. 얼마 전 새로 개장한 근처 리조트에서 북카페의 바리스타를 구한다더군요. 딸아이가 지금 하는 미운 짓에서 조금만 더 못되게 굴면, 빈말이 참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듣는 딸아이는 콧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아비한테 하는 말 치고 참 뻔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빠, 작년에 아빠 얼굴로 우리 가게 상표등록했잖아.
그거 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 아빠는 어딜 가나 내 거야.
그냥, 언짢아도 우리 가게에서 일해.
아무리 치사하고 피곤해도 자식 그늘이 세상에서 제일 편한 거야.
물론, 카페 일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노인네 둘이서 우물떡 주물떡 해도 될 만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즈음은 컴퓨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세상입니다. 가게에서 쓰는 빨대 하나, 종이컵 하나도 인터넷으로 주문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저희 가게에서 로스팅하는 커피의 생두 가격도 인터넷으로 확인하고 흥정을 합니다. 세금이나 공과금은 말할 것도 없고, 얼마 전엔 나라에서 주는 코로나 재난 지원금도 스마트폰으로 신청하고 받더군요. 때문에, 우리 딸아이가 가게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인 것은 맞습니다. 네, 맞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제가 아주 오랫동안 우리 딸에 대해서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딸이 가게에 냉큼 엉덩이를 붙이고 들어앉은 것도 벌써 삼 년이 다 되어갑니다.
어느 날. 직장에 다니던 딸이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딸아이 말로는 회사의 재정상황이 좋지 않다더군요. 그러고는 몸이 좋지 않아 병치레를 심하게 했습니다. 그 후로는 달리 찾는 회사가 없는지,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딸이 저를 잘 아는 만큼, 저도 딸아이에 대해서는 알만큼 알지요. 아무리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제 자식이라지만, 누구나 못난 구석은 있기 마련입니다. 제 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굳이 회사의 재정상황을 핑계 대지 않더라도, 평소 직장생활에 부침이 많았던 딸입니다. 그래서 회사를 자주 옮겨 다녔지요. 그러다 나이를 먹고, 연차는 많아졌지만, 그다지 이렇다 할 경력이 없다 보니 찾아줄 만한 회사가 없었겠지요. 제게 맞지 않는 일을 오랫동안 끙끙대며 하다 보니, 자연 건강도 나빠졌을 것이고요.
나이가 나이니, 직장생활 대신 제 가게를 꾸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승질머리가 팩 하기는 했도 평소 야물딱지고 사근사근한 성품에다 소싯적부터 장사는 꽤 해봤으니, 직장 생활보다는 낫겠다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우리 두 늙은이가 가게를 도맡기에는 힘이 부치는 일도 많았고요.
뭐, 지금까지 함께 가게를 꾸려보니 제 생각이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딸아이의 얼굴도 많이 밝아지고, 적성에도 잘 맞는 것 같구요. 가게 매출도 저희 두 늙은이가 할 때보다는 많이 늘었습니다. 코로나 시국이라 퍽 어려울 때인데, 잘 버텨주었지요. 그래서 참 장하다 싶은 마음도 종종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 늙은 아비와 어미가 감당하기는 몹시 피곤하고 귀찮은 사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