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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카페 딸 Sep 29. 2022

전직 도인의 도시생활 부적응기

할아버지카페의 시작

 

 

할아버지, 젊었을 적엔 뭘 하셨어요?      


보통 카페의 주인은 젊은 사람이기 마련인데, 저처럼 수염이 허연 영감이 손님을 맞으니 많이 궁금한가 봅니다.  그래서일까요? 저와 제 인생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물어봐 주시는 손님들이 종종 계십니다. 그와 같은 손님을 마주하면, 저 또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마치, 먼 길을 지나온 나그네가 쌀쌀한 가을 저녁에 운좋게 만난 모닥불 같은 느낌이랄까요. 곁불을 쬐며 언 몸을 녹이고 쉬어가는 기분이 듭니다. 제가 아무리 나이가 많고 세상사에 너그럽다 해도 가게에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무덤덤해지고 피로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때에 누군가 나에 대해 진심으로 알아보기를 원하며 친구 하자, 손을 내미는 기분이란. 여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말이죠. 그러면 저도 모르게 주섬주섬 제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지요. 


자, 가만있어 보자, 


잠시 뜸을 들인 다음에 말이지요.   

  

할아버지 카페를 하기 전까지, 저는 우리 동네의 이름난 태극권 선생이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솔밭에서 아침마다 동네 어르신들을 모아 태극권을 가르쳤지요. 아마도 독자님 중에는 제가 어떻게 태극권 선생이 되었는지 궁금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략 삼십 년 정도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저는 옛 선인들이 남겨놓은 현자의 답을 찾고자 중국에 공부를 하러 떠났습니다. 그것도 북경이나 상해처럼 번화한 도시가 아니라, 변방에 가까운 내몽골 자치구의 적봉이란 곳까지 같지요. 그곳에서 주역을 공부를 하던 중 태극권을 접하게 되었지요.  그보다 이전에는 세상의 이치를 닫는 공부를 위해서 산중에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옛 선인들이 남겨놓은 책을 읽으며 연구를 하고 그들의 발자취를 쫓았습니다. 그밖에는 마음을 닦는 수련을 했지요. 그렇게 대략 20여 년을 보냈습니다.     


여기까지는, 사나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어 봤을 낭만적인 삶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하얀수염에 근사한 외모를 가지고 있더라도 꼭, 인생의 좋은 시절, 좋은 이야기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속세를 초월하여 대우주와의 합일을 꿈꾸는 도인도 별수가 없었지요. 나이가 들고, 아픈 곳이 많아지면서 저 또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날로 쇠약해지는 제 건강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산속에서 혼자 지내는 저에 대한 가족들의 걱정이 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더라도 저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고 할아버지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듣게 되었을 무렵엔, 제가 전직 도인이어서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종일토록 집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나이 든 마누라와 하천변을 산책하거나, 동네 텃밭을 가꾸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때때로 영화관 나들이를 할 때도 있고,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던 중학교 동창들을 만나서 시내 구경을 할 때도 있지만. 그마저도 어쩌다 수중에 돈 푼이 생겼을 때나 일이지요. 일정한 벌이 없이 자식들이 주는 돈을 제 여가에 야금야금 쓰려니, 그마저도 아비로서 할 짓이 못되었습니다. 사실, 아이들이 알면 펄쩍 뛸 일이지만-아니, 옆에서 함께 글 정리를 하던 딸 사장이 벌써 펄쩍 뛰었네요.- 마누라와 의논 끝에 근처 빌라의 경비를 지원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찌나 경쟁이 심하던지요. 반칙이긴 하지만, 아는 사람의 추천까지 받았지만, 결국 떨어지고 말았지요. 탈락 이유는 수염 때문이었습니다. 제 수염이 빌라 경비를 하기엔 너무 근사하다나요. 수염 값을 하고 살라며 채용 담당자가 한마디 하더군요.    

 

저는 맥없이 뒷방 늙은이가 되어가는 것이 몹시도 서글펐습니다. 그 무렵의 저는 짜증이 심했습니다. 별 것 아닌 일에도 크게 화를 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더러는 손에 쥔 물건을 저도 모르게 집어던질 때도 있었으니까요.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이 정도니, 가족들의 심경은 오죽했을까요.      


저는 이 문제로 꽤나 오랫동안 고통받았습니다. 사실은 가게를 차린 이후에도 계속되었지요. 그 때문에 이웃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가게를 찾는 손님도 불편함을 겪어야 했습니다. 물론, 가게의 매출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나중에 가족들의 권유로 병원 치료를 받고 보니, 노인성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고보니 병원에 가는 문제만 하더라도 가족들과 얼마나 길게 실랑이를 벌였는지 모릅니다. 이 늙은이 생각에는 제가 가야 할 병원이라는 곳이, 정신이 이상하고 구제할 수 없는 사람들만 가는 곳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일평생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해 온 나인데, 마음에 문제가 있다니. 저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생각에는 가족들이, 특히 우리 딸 사장이 이 아비를 욕보인다고 느꼈습니다. 우리 딸 사장은 평소에도 어른 어려운 것을 잘 모르는 데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야 하고. 마음먹은 일도 저질러 봐야 직성이 풀리는 위인이었거든요. 그건, 제 아비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때의 괘씸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막상 병원을 찾고 보니 잘했다 싶습니다. 그와 같은 노인성 우울은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니더군요. 저와 같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닌지라. 전문 진료과가 있더군요. 제 생각처럼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불치의 장애가 있는 사람들만 오는 것도 아니었고요. 선생님에게 말을 들으니,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들도 스스로의 심신을 점검하고 관리하기 위해 자주 찾는다고 하더군요. 말을 듣고 보니 되려 저는 가족들과 함께 해서 아주 다행이었습니다. 더러는 혼자 영문도 모르는 속앓이를 하다가 도리어 가족들과 척을 지기도 하고, 또 더러는 술이나 잡기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게다가 의사 선생님이 미인이신 데다 어찌나 사분사분 친절하게 말씀을 잘해주시는지, 마음이 놓였습니다


무엇보다 큰 다행인 것은 제 생각처럼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노인이 되면서 자연스레 찾아오는 호르몬의 불균형으로 생긴 병이었으니까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문제였지요. 저녁에 자기 전 먹는 약 두서너 알이 치료약의 전부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저는 지금껏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비애감이나 분노, 슬픔 등을 충분히 떨쳐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병원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저를 잘 추스를 수가 있었지요. 제 자랑 같지만, 칭찬은 노인에게도 즐거운 법입니다.


근래에 들어서는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은 후련함을 느낍니다.


아무리 저처럼 마음을 다스리는 도인 공부를 했더라도, 노인이 되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지요. 그래서 지금은  우리 카페를 찾는 제 나이의 친구들이나 형님, 누님들을 보면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하고,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제가 느꼈던 슬픔이나 비애감, 분노 등의 감정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혼자 보다는 주위의 누군가와 함께 할 때 훨씬 이겨내기가 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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