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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Dec 11. 2020

미안하다, 얕잡아봤다, 밀키트

문명의 이기는 누리고 살 일이다.

오래 살다 보니 별 희한한 걸 다 보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암만,
오래 살아야 혀어~


  거의 한 세기를 사셨던 할머니는 새로운 것을 보면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한국강제병합(경술국치)이 있던 1910년 생이셨으니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고 사셨던 분인데도 놀랍고 신기하고 새로운 것들은 삶에 대한 애착을 불러일으켰던 것일까?


  새로운 것들은 문명, 문화를 아우르는 전반적인 진보일 텐데 해가 갈수록 새로운 것들은 더 많이, 더 빠르게 우리 생활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것들을 보면,

‘와, 놀라워, 대단한 걸. 한 번 사서 써볼까?’

호기심이 발동하였다가도,

‘이대로가 편할 수 있어. 굳이? 새로운 게 한 두 개 라야지, 그걸 다 사다가는 거덜 나기 십상이다. 기회가 되면 나중에 해보지, 뭐’ 라며 이내 심드렁해진다.

확실히 신세대 마인드는 아니다.

변화에 민감하지 못한, ‘쉰세대’ 임에 틀림없다.


  그나마 할머니 말씀처럼 오래 살아야 천천히 해보기라도 하려나?

그럼 뭐해? 또 새로운 게 나올 텐데...

그냥 신문명과 문화를 접하면 뒤로 자빠질 듯 놀라 며 박장대소하는 ‘리액션 전문 방청객’ 모드로 살아야 하나보다 한다.


포장에 대한 고민은 있어야 될 것 같은 밀키트.  아이스팩이 물로 채워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짜자잔~ 밀키트(Meal Kit. 재료가 손질돼 있어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음식)라는 신문물이 배달돼 왔다. 아들이 <가족사랑 엽서 공모전>에 당선되어 받은 부상이다.

‘원님 덕에 나발 분다’ 더니 아들 덕에 잔치상 차리게 생겼다.


  밀푀유나베, 보쌈세트, 코코넛 쉬림프 2인용 3세트로 고기와 해산물, 국물음식이 조화로워 다른 찬거리 없이 이대로도 근사한 한 상이 차려질 것이다.


소고기 밀푀유나베 구성과 만드는 과정, 끓이기 전 데코레이션.


  밀푀유나베 종이띠 뒷면에는 조리방법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어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

단위 포장은 육수용 소스부터 찍어 먹을 소스, 칼국수, 팽이버섯, 깻잎 등 9개로 되어 있다.

최고의 보물을 찾기까지 9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듯 종이와 플라스틱, 비닐로 꽁꽁 싸매져 있다.

재료를 꺼내는데도 몇 번의 가위질과 비닐 씻기의 과정이 필요했다.

포장에서 재료를 분리해 내는 과정이 매번 음식을 손수 하는 입장에서는 번거롭고 과하다. 재료의 양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쓰레기도 양산된다. 배 보다 배꼽이 더 큰 모양새다.

음식은 한 냄비에 담겼는데 남겨진 쓰레기는 한가득이니 말이다.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재료들의 신선도 유지를 위해 개별포장을 한 것인데 내포장재의 100% 생분해성 수지, 농업부산물로 만든 밀짚 펄프 등 친환경적인 포장방법에 대한 숙고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이거 먹자고 쓸데없이 쓰레기만 만들었나?' 하는 미안함이 들기도 했다.


밀키트 3종 구성으로 근사한 한 상이 차려졌다. 식사 시작!!!

  

  사실 밀키트에 대한 선입견은 있었다.

1) 가격이 비싸다 2) 음식 취향이 다르니 구성된 재료 외에 몇 가지를 넣거나 안 먹는 재료가 있을 수 있어 번거롭거나 아까울 수 있다 3) 많은 쓰레기가 발생한다 4) 인스턴트의 맛이 강할 것 같다 5) 다음 끼와의 연결성이 없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서 먹고 나서의 종합적인 평점은  별 다섯 개 만점에 4개는 줄 수 있겠다.

'미안하다, 얕잡아 봤다, 밀키트'


  특히, '소고기 밀푀유나베'는 올 1월부터 7월까지 약 5만 개가 판매되며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스페이퍼를 추가해 야채와 고기를 싸 먹고 칼국수를 끓이고 죽까지 해 먹으니 2인분의 양이라도 4명 가족이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 맛도 이만하면 합격점이고 육수를 끓이는 시간과 수고를 덜 수 있어 만족이다.


  밀키트 매출은 SSG닷컴의 분석에 의하면 1월부터 7월까지 전년 동기 대비 450% 증가했다고 한다.

여러 조리 과정을 생략하고 짧은 시간 내 한 상을 차릴 수 있는 장점이야 말로 1~2인 가구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주요했을 것이다. 더구나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으로 인해 외식이 준 현실에서는 합리적인 방법 혹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와, 이거 엄마가 해준 것보다 훨씬 더 맛이 있는데요."

이런 감탄사를 쏟아내는 아들의 말만 없었어도 다른 밀 키트 구입을 고려했을 터인데,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난 상황에서는 '더 이상의 밀키트 구입은 없다'로 귀결되었다. 짜슥이, 마...


  새로운 문물의 경험은 '삶에 대한 애착'까지는 아니더라도 신선한 충격과 반가움이었다.

손쉽고도 맛있게 한 끼를 해결하였으니 ‘문명의 이기(利器)’는 때로 누리고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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