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왔다. 보통 나는 엄마라고 부르지만 왠지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어머니라고 해야 할 것 같은 사회적, 내면적 압박을 느낀다.
양가 도움 없이 온전히 아이케어와 맞벌이를 하다 보니 직장에서는 딱한 시선도 원망의 시선도 받고 본의 아니게 아이가 아플 때는 직장에 민폐를 끼치며 숨 가쁘게 달려왔다. ‘존버는 승리한다.’는 인생 어디에도 다 적용되지만 특히 육아에도 크게 적용되는 것 같긴 하다.
내 아이가 아파서 직장에 늦거나 연차를 쓰는 행위가 ‘민폐‘가 되는 세상이 너무 거지 같다. 그래놓고 아이를 많이 낳으라니. 그래놓고 저출산이라고 고래고래 언론에서 떠든다. 애는 낳아보고 키워보고 정책들을 만드는 건지... 더 이상 글이 산으로 가고 싶지 않기에 여기까지.
아이의 어린이집 방학이 닥쳤다. 물론 긴급 보육은 한다지만 오로지 담임선생님 말만 잘 듣고 담임선생님만 좋아하는 우리 아이를 통합학급 선생님이 보기엔 좀 힘든지 담임선생님께서 간곡하고도 정중하게 혹시 방학 8일 중에서 자신이 연차를 쓰는 딱 4일만 어떻게 좀 가정 보육이 안 되겠냐고 부탁을 하셨다.
처음엔 국공립도 이런 상황인데 도대체 찐 맞벌이는 애를 어디에 맡겨야 하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일 년 내내 내 새끼 먹이고 재우고 봐주신 선생님들도 숨 좀 돌리셔야 할 것 같아서 친정엄마에게 SOS를 쳤다. 다행히 시기가 괜찮으셔서 와 주신다고 했다.
엄마가 계시니 일단 나는 며칠 동안 컵 한 번을 씻지 않았다. 밥도 차린 적이 없는 것 같고 출근을 혼자 하니 발걸음이 이렇게나 가벼울 수가 없다. 등 하원 씨름을 하지 않고 아침마다 옷을 입자고 아이에게 사정+구걸하는 한 겨울에도 겨땀나는 상황이 펼쳐지지 않았다. 그러니 퇴근을 하고도 에너지가 남는 느낌이다. 와. 친정엄마가 봐주시는 육아는 정말 꿀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시어머니 도움 육아는 당연히 열외다.
그렇지만 이미 거의 10년을 따로 살게 된 엄마와 나는 어느샌가 가치관과 행동방식이 많이 달라져있었고 불편한 점도 있었다. 무슨 음식이든 따라다니며 끝까지 먹으라는 엄마와 먹기 싫으면 그만 먹고 버리는 게 정서에 더 좋다고 생각하는 딸. 더 못 먹겠는 음식을 먹으라고 자꾸 강요하는 건 폭력과 같다고 생각하지만 내 엄마니깐 용서하고 꾸역꾸역 먹었다. 잠시라도 먹던 음식이나 마시던 물을 뚜껑 없이 두면 먼지 앉는다고 덮어두라는 엄마. 아니 좀 만 이따가 먹을 거라고... 물을 어떻게 매번 내가 정확히 마실 만큼만 따를 수 있냐고.. 속으로 소리쳤다.
냉장고는 이렇게 정리해야... 음식재료는 이렇게 보관해야... 등등등. 그렇지만 엄마도 늘 마무리는 ‘그래 네가 직장 다니면서 이렇게 할 시간도 에너지는 없겠지..’로 마무리하신다. 다행이다. (이 부분이 통마늘을 가져다주며, 통 굴비를 가져다주며 쉴 때 슬~~슬~~ 마늘을 까서, 굴비 비늘을 벗겨서 아기 먹이라는 시어머니와 극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엄마는 장작 5년 동안 한 번도 정리하지 않은 팬트리를 이제 정리하자고 칼자루를 내미셨다. 게을러서 미안한 사위는 계속 우리들이 하겠다고 극구 장모를 말렸지만 사위가 아기랑 외출을 한 사이를 최적기로 설정한 행동파 엄마는 이미 팬트리 문을 열고 꺼내기 시작했다.
두세 시간 동안 꺼내고 버리고 뭐가 있는지 살펴봤다. 와. 정말 쓸데없는 것도 많고 사놓고 어디 있는지 몰라서 또 샀던 물건들도 있었다. 상자에 넣고 라벨지를 출력해서 붙였다. 이건 뭐냐고 물어보고 내가 대답을 생각하는 사이 이건 또 뭐냐고 물어보는 엄마와 산더미만큼 쌓인 잡동사니 사이에서 화내지 않고 죽어라 분류하고 정리한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다.
남은 몇십 장의 청첩장, 집들이 선물로 가장 많이 받은 향초, 디퓨져, 아기 용품, 지난 버전의 핸드폰, 각종 설명서, 스노클링 기구, 자전거 라이딩 용품, 청소용품, 공구 등등.. 꼭 필요할 것 같지만 있는지조차 망각하고 5년 이상을 살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다 버려도 삶에 아무 지장이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을 버리는 용기는 어째서 그토록 나지 않았던 것일까.
“버려라, 버려야지 깨끗해진다. 다 버려도 다 살 수 있다. ”
(buy X, live O)는 엄마의 명언을 새기기로 했다.
근데 엄마, 엄마 예전에 버리기 좋아하다가 아빠가 책 속에 숨겨둔 우리 집 땅문서인지 설계도인지 뭔가 그것도 내 폐휴지로 버려버려서(내가 어릴 적엔 학교에 한 번씩 폐휴지를 가져오라고 했다.) 집이 난리 난리가 나서 엄마랑 나랑 방과 후에 학교에 찾아가서 다행히 아직 쓰레기장으로 가기 전 학교 복도에 세워져 있던 몇 개의 마대자루를 담임선생님과 함께 다 쏟아붓고 서류를 기어코 찾아냈던 거 기억하지?
우리 엄마는 버릴 수 있는 용기가 너무 과도하게 큰 사람이다. 그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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