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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Apr 18. 2024

포기하면 편하다

 내 아버지는, 모든 걸 자신의 철저한 통제와 계획 아래에 두어야 속이 편한 사람이었다. 경제권을 모두 쥐고 있었고,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아버지가 직접 결정해야 했다. 일례로, 엄마의 정기진료와 종합검진, 치과 치료 등의 일정을 꿰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가 직접 다 예약해서 당사자인 엄마에게 알려 주었다. 고지혈증 약을 복용하는 엄마는 위내시경 등의 검사를 받으려면 출혈경향을 높이는 약을 일주일 정도 전부터 복용 중지하여야 했는데, 아버지는 엄마의 약봉지에 날짜와 복용 시간을 모두 기입해 놓고, 그중 출혈경향을 높이는 약만 검진 일주일 전부터 미리 다 빼놓았다. 엄마는 그저 약봉지에 아버지가 적어 놓은 일정대로 약을 잘 챙겨 먹기만 하면 되었다. 엄마의 지인들은 그러한 아버지를 세상 꼼꼼하고 다정한 남편이라며 부러워했고 의존 성향이 강한 엄마의 경우 그러한 삶에 만족했지만, 자식들의 입장에서 그렇게 뭐든 하나하나 통제하고 계획하는 아버지란 무척 숨 막히는 존재인 것이다. 자식들의 진로와 미래도 모두 아버지의 통제와 계획대로 이루어져야 했으니까. 나보다 똑똑하고 공부도 잘했던 언니는 공무원 시험을 보아야 했고, 언제나 아버지에게 ‘시원찮은’ 존재였던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버지의 큰 기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기대가 없는 자식이라고 그 자식에 대한 통제와 계획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머리카락 길이와 내가 듣는 음악까지 하나하나 간섭하던 아버지는 내 진로마저 바꾸려 들었다. 심지어 문과에서 이과로. 메디컬 드라마를 좋아해서 거기서 나오는 의사들과 간호사들을 보며 멋지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삶이 내 삶이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냥, TV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향한 동경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도, 나를 ‘간호사’로 만들겠다는 아버지의 결심은 아주 굳건했다. 심지어, 엄마와 언니까지도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국문과 졸업을 앞둔 언니는, 내가 너와 바꿀 수 있다면 난 바꿀 거라며 너라도 취업 잘 되는 과로 진학하라고 했다. 내 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IMF사태’가 주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간호학과는 졸업만 하면 100% 취업되는데 뭐 하러 국어교육과에 가냐 임용고시 합격이 얼마나 힘든 지 아냐 온갖 말로 나를 설득하다가 안되니 너 가고 싶은 대학에 가면 등록금을 주지 않을 거라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안 간다고 끝까지 밀어붙이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울면서 도리질하며 싫다고 하는 것도 나로서는 큰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통제에 길들여져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 아이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심지어 그때의 난, 아버지에게서 완전히 독립한 성인이 아닌 이제 막 수험생 신분에서 벗어난 18세 학생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나한테 말하지, 나랑 같이 월세방 구해서 살면서 아르바이트하면서 학교 다녔으면 되는데,라고 말했지만 그건 그 친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녀가 자신의 통제와 계획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소리 지르고 때리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는 무기력과 포기에 익숙하다. 내 뜻과 소신을 밝히면 ‘니 까짓게’ 혹은 ‘어디서 어른한테’로 시작하는 30분 이상의 일장 연설을 듣고, 내 고집을 조금 더 내세워 보거나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반항이라는 걸 해봤다가 머리를 가격 당하거나 하는 삶에 익숙해지면, ‘어차피 안 되는 거 더 혼나기 전에 접자.’라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말로든 손으로든 물건으로든 맞으면 아프니까.

 내 나름대로의 용기를 내어 반항을 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음을 깨닫고, 나는 접수하려던 원서를 찢어 버리고 새롭게 간호과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내가 응시할 학교까지 정해 주었고, 나는 순순히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꿈꿔왔던 대학생활의 낭만 따위는 이미 저 안드로메다로 떠나 버리고 무기력함만 남았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대학만 가면 다 해결된다’는 대학만능론이 통할 때였다. 대학 가면 놀 수 있다, 대학 가면 살 빠진다, 대학 가면 남자친구 생긴다... IMF사태 전의 우리나라는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의 간판만 달면 취업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저 진학만 하면 되는 거였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교실에 갇혀 살아도 대학만 가면 이 삶에서 해방이니까, 똑같은 교복에 똑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앉아 있어도 대학 가면 이뻐지고 살 빠지고 캠퍼스의 낭만이 우릴 기다린다고 하니까, 그 말만 믿고 그 답답한 삶 속에 우리의 10대를 갈아 넣었지만 수능을 보고 나니 IMF사태가 터졌고, 대학에 원서를 넣기도 전에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세대가 되고 말았고, 나는 내가 내 미래를 걱정하기도 전에 한 발 앞서 내 미래를 걱정하다 못해 내 미래의 청사진까지 모두 그려놓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아무런 기대도 의욕도 없이 대학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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