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일 때 내가 꿈꾸던 대학생이 된 나의 모습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동아리 활동도 하고,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어 부모님의 간섭 없이(매우 중요) 내가 쓰고 싶은 곳에 돈도 쓰고, 공강시간에는 친구들과 캠퍼스에서 즐거운 시간도 가지는 그런 일상이었다. 하지만, 간호대학생에게는 동아리 활동도 아르바이트도 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고 공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교시부터 8교시까지 강의를 듣다가 집에 오면 지쳐서 뻗기 일쑤였고, 토요일엔 술을 먹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갔다. 여름방학은 뭐 하며 보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1학기와 2학기 모두 몸은 바쁘게 움직이고 머리로는 도대체 왜 자퇴도 휴학도 재수도 하지 않고 이렇게 사냐며 용기가 없는 나 자신을 탓하기만 하다 보니 겨울방학이 되었다. 2학년이 되면 실습과 학업을 병행해야 해서 방학 때도 쉬지 못한다는 선배들의 말을 듣고서, 1학년 겨울방학은 진짜 게으르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방학 첫날부터 침대에 누워 음악을 듣고 만화를 보며 최선을 다해 게으르게 보내고 있는데, 과 동기에게서 연락이 왔다.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보지 않겠냐는 거였다.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못 해본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던 데다 다른 곳보다는 병원에서 일하는 게 전공도 살리고 좀 더 낫지 않겠냐는 단순한 생각으로 선뜻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선택을, 출근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후회하게 되었다.
나의 첫 아르바이트지이자, 첫 의료기관은 오래된 산부인과 의원이었다. 오래전에는 분만과 입원도 했었지만, 내가 아르바이트 할 당시에는 부인과 질병의 진료와 치료, 그리고 낙태수술이 병원의 주 수입원이었다. 일하는 사람은 병원의 원장이자 유일한 의사, 그리고 간호사도 조무사도 아니고 학생인 나, 이렇게 단 둘이었다. 내게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준 동기의 말에 의하면 돈을 아끼기 위해 간호사도 조무사도 아닌 학생을 아르바이트로 채용해서 접수와 진료 보조 등의 업무를 하게 하고, 간호사가 꼭 필요한 상황에서는 전직 간호사인 사모님이 잠시 내려오곤 했다. (병원 건물 3층이 원장님 댁이었는데, 수술이 잡히면 원장님 댁에 전화를 걸어 알려야 했다.) 해부학과 생리학 등을 배웠지만 막상 병원에서 실무를 하기엔 아는 게 없어도 너무 없는 내가, 하루아침에 접수를 하고 진료 보조를 하고 검사 안내를 하고 약을 조제하고(의약 분업 전이라 병원에서 약을 조제해서 주곤 했다.) 수납을 하고 물품 소독과 병원 청소까지, 갑자기 진료를 제외한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하는 만능 직원이 된 것이다. 단 하루 만에 이 모든 업무의 인수인계를 받고 그다음 날부터 출근해서 혼자서 모든 일을 해야 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원장님마저 무척 괴팍한(...)분이었다. 업무가 서툰 내게 환자가 보거나 말거나 화를 내는 것은 기본이었고, 환자가 오지 않는 시간이 무료해서 책이라도 읽고 있으면 여기 놀러 왔냐며, 전공책을 보라고 소리를 질렀다. 병원 진료 시작 시간은 9시이고 원장은 내게 10분 전에 출근해서 병원 청소를 하라고 했는데, 내가 8시 52분에 출근한 날 너무 화를 내길래 그다음 날은 아예 8시 40분에 갔더니 병원 문이 잠겨 있었다. 45분쯤 되자 병원 현관문을 열다가 나를 발견한 원장님은 쓸데없이 일찍 왔다며 앞으로 시간을 딱 맞춰 오라고 했다. 그 이후부터 원장님을 부르는 내 마음속 호칭은 ‘저 구두쇠 변태새끼’가 되었다.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휴일에도 진료를 했고 나도 당연히 출근했지만, 휴일 수당 같은 건 절대 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을 데리고 의원을 운영하려니 본인도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겠지만, 간호사나 조무사를 채용하는 비용을 아끼려고 본인이 한 선택이니 내게 화를 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원장님은 약 열흘 정도를 소리 지르고 짜증을 내다가 내가 일에 제법 익숙해져 실수 없이 모든 일들을 처리하자 그제야 나를 그나마 사람취급(!) 해주기 시작했지만, 나는 결국 못 견디고 그 병원에서 딱 한 달을 채워 월급봉투를 받아 들고 그만두게 되었다. 원장님의 만행을 적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사실 내가 정말 견디기 어려웠던 결정적인 이유는 업무의 고됨도 원장님의 뭣 같은(...) 성질을 받아주기 힘들어서도 아니었다.
-2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