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은 참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정해진 출근시간(8시 50분)에서 빨리 오면 빨리 온다고, 1분이라도 늦으면 늦는다고 화를 냈다. 간호과에 재학 중이라고는 하나 현장 실습 한 번 나가보지 못한 1학년인 나를 싼 값에(!) 채용해 놓고, 내가 모든 일을 완벽하게 알아서 빠릿빠릿하게 하지 못한다고 화를 냈다. 진료 보조 시에 이름조차 생소한 의료기구를 한 번에 착 대령하지 못해서 혼나고, 원장님이 손글씨로(!) 직접 쓴 처방전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게 무슨 글자인지 다시 물어봤다가 혼났다. 어느 현장에 던져 놔도 하루이틀만 배우면 착착 잘 해낼 자신이 있는 잔뼈 굵은 간호사가 된 지금 생각해도, 혼자서 접수와 수납과 약 조제와 진료 보조와 청소 등 한 의원의 모든 일을 다 해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데, 웃으면서 인사해도 잔뜩 찌푸린 얼굴로 제대로 대답도 안 하는 사람이 바로 원장님이었다. 원장님은 또 어찌나 짠돌이인지, 일요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병원의 문을 열었다. 내가 근무했던 12월에는 크리스마스가 있었는데, 무려 크리스마스에도 병원 문을 열었다. 그때는 아르바이트에게 최저시급도 근로계약서 같은 것도 없던 열악한 시절이라 고용주가 부르는 게 값이었고, 주휴수당의 개념도 없었다. 시절이 그렇다 하더라도 크리스마스에 근무를 하게 했으면 조금 일찍 퇴근시켜 주거나 만 원 한 장이라도 쥐어줄 법한데, 원장님은 그런 그릇이 전혀 안 되는 사람이었다. 진료 시 사용하는 소모품 하나라도 허투루 쓰면 불호령이 떨어졌으며, 의료폐기물 처리에도 비용이 드니 폐기물을 빈틈없이 꽉꽉 눌러 담아야지 폐기물 봉투에 빈틈을 보이는 건 죄악이었다. 나도 아끼는 걸 좋아하고 절약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지만, 원장님은 절약가가 아니라 구두쇠였다.
그래도 원장님의 그런 면은 견딜만했다. 우리 집에도, 저 정도면 궁상 아닌가 싶게 절약을 열심히 하며 툭하면 화를 내는-원장님이 한 수 위긴 하지만-분이 한 분 계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건, 그 병원의 주 수입원이 바로 임신중절수술이었다는 거다. 어디서 어떻게 입소문이라도 난 건지, 골목 안쪽 후미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 찾기도 힘든 이 병원에 중절 수술을 받겠다는 환자가 하루에 두 세명 씩 찾아왔다. 아직 솜털이 보송한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한겨울에도 짧고 착 달라붙는 스커트를 입고 수술을 받으러 오는 여성들, 아니 여성이 아니라 소녀란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 환자들의 혈압과 체온과 맥박을 재고, 수술이 끝난 후 그들이 회복실에 누워 있으면 또 혈압과 체온과 맥박을 재는 게 내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컨디션이 어느 정도 안정된 듯하면 수술실에 가서 청소와 정리를 해야 했다. 수술 준비와 보조, 수술 기구를 치우고 챙기는 일 등은 원장 사모님의 몫이었지만, 수술실에서 나온 세탁물과 쓰레기를 치우는 건 내 몫이었다. 수술실 한편에는 커다란 검은 봉지가 놓여 있었는데, 그 검은 봉지 안에는 수술을 통해 그녀들의 몸속에서 나온 부산물들이 들어 있었고 나는 그것을 의료폐기물을 모으는 통으로 가져다 버려야 했다. 그 부산물들 속에는 태아도 있을 터였다. 낙태가 죄냐 아니냐, 태아가 사람이냐 아니냐 그 시절에나 지금이나 의견이 분분하지만, 조금 전까지 그녀들의 뱃속에서 살아 움직이던 태아가 그렇게 수술에 의해 꺼내어져 그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여러 가지 것들과 함께 비닐봉지에 담긴다는 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중절수술이 끝나고 수술실에서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나올 때마다, 폐기물 모으는 통을 열고 그 봉지를 거즈나 알코올솜 같은 의료폐기물 속에 던져 넣을 때마다 나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에 사로잡혔다. 중절수술을 받기까지, 그녀들에게도 수많은 사연과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원장님에게도 자신이 먹여 살려야 할 아내와 아들 둘이 있었다. 나도 아버지한테 손 안 벌리고, 내 용돈 정도는 내가 벌어서 쓰고 싶었다. 우리들 모두가 각자의 사정과 필요에 의해, 작고 연약한 생명체가 한낱 의료폐기물이 되어 버려지는 과정에 조금씩 일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검정 봉지를 버리며 구역질을 했고 그다음에는 울었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나며 나는 점점 수술실을 치우고 검정 봉지를 버리는 일에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졌다. 그러다 문득, 이 일이 너무 익숙해진 나 자신이 무서워졌다. 이래도 되는 걸까. 아무리 내가 중절수술을 권한 것도 아니고 내가 직접 수술 과정에 관여한 것도 아니고 그저 허드렛일만 하는 입장이지만, 개강 직전까지 여기서 계속 일을 해서 돈을 벌어 내 주머니가 두둑해지면 나는 행복할까.
딱 한 달을 채우고 그만두는 나에게 원장님은 마지막날까지 화를 냈던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끈기가 없다는 둥 후임자가 마음에 안 든다는 둥 하고 말이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나왔지만, 그래도 마지막 퇴근길은 너무나도 홀가분했다. 돈은 얼마 벌지도 못했고 남아 있는 겨울방학도 백수로 지내게 생겼지만, 좀 더 벌어보겠다고 계속 버티다가 어느 순간 내 멘털이 바스러졌을지도 모른다. 한 달 동안 일하면서 아주 짧고 굵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을 배웠다. 바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해도 윗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할 수(심지어 매일 구박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과, 돈은 얼마를 버느냐보다 어떻게 버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 첫 의료기관은 최악의 상사와 최악의 일거리를 만나게 해 주었지만, 20년이 넘도록 사회생활을 하며 힘들거나 고민되는 순간에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